A Small Step Forward 유학, 연구, HCI, 정보와 사람, 창의성

16Mar/115

2011년 봄

2월부터 시작한 학기는 'Spring' semester 라고 불리지만, 날씨가 봄이어서 그런건 아니었다. 2월 내내 꽁꽁 싸매고 다니다가 3월이 되니 드디어 조금은 봄의 기운이 느껴진다. 낮이 되면 해도 나고, daylight saving (80년대인가 우리나라에서도 했던 써머타임) 이 시작되면서 해도 길어졌다. 전반적인 생활도 꽤 안정적이고, 바쁘다면 바쁘고 여유롭다면 여유로운 생활을 보내고 있다.

합창단

이번학기부터 MIT Chamber Chorus 에서 테너로 노래를 하고 있다. 20명 정도 규모의 크지 않은 합창단으로, 파트 당 5명 정도가 노래를 한다. 들어갈 떄는 오디션을 보는데, 솔로로 한 곡을 부르고 간단한 시창을 테스트한다. 합창단을 학부 내내 했으면서도 막상 이럴때 부를 노래가 없구나 탄식을 하면서, 부랴부랴 2002년인가 음악학교 때 듣기만 했던 Ombra Mai Fu 를 속성 연습해 갔다.

시창도 운이 좋게 꽤 들어서 익숙하지만 공연은 해보지 않았던 Jesu Meine Fraude 를 하게 됐다.

어쨌든 합격을 했고, 내 숙원사업이었던 '유학생활 중 노래하기'가 드디어 이루어졌다. 화목 아침 9시 30분부터 90분 연습. 다들 잘하고 시창도 빨라서 진도가 휙휙 나가는 게 기분이 좋다. 이번 학기에만도 크고 작은 3번의 공연이 예정되어 있다. 한국서 오비공연 할 때 샀던 턱시도도 공수해 왔고. 언제 입으려나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입을 날이 왔다. 내 일생의 세번째 합창단이구나 그러고 보니. 노래를 하면서는 좋은 기억들이 많아서 기대가 된다. 한편으로 무대에 섰고 불렀던 기억은 너무 강렬하기도 해서, 남들은 배경음악으로 깔아놓고 듣기 좋은 노래들도 어느새 몰입해서 따라 부르게 되어 집중이 도무지 되지 않는 부작용도 있다.

Visit Day

하버드와 MIT Computer Science Ph.D. 프로그램에 합격한 학생들이 학교를 방문하는 Visit Day 이벤트가 열흘 전쯤 있었다. 얼마전 글로도 썼듯 굉장히 중요한 이벤트고 학과와 교수님, 학생들 모두 신경을 많이 쓴다. 어쩌다 보니 양쪽 학교 이벤트에 다 참여를 하게 되었다. 약 10명 정도의 HCI 관련 학생들이 방문을 했고, 이 학생들과 연구 관심사, 각 학교/교수님/분위기/환경 등에 대해 궁금한 점 등에 대해 얘기를 많이 나눌 수 있었다. 나도 비지팅 다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1년이 지났구나 생각을 하니 조금 조바심이 생기는 것 같기도. 한편으로는 학생들이 내가 속해있는 곳에 대해 궁금해하는 점들을 보니, 외부에서 보는 MIT, 보스턴 HCI 에 대한 시각도 다시금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 아래 사진은 내가 일하는 MIT CSAIL Stata Center 7층에 방문하는 학생들을 위해 우리 랩에 Katrina 가 깜짝 이벤트로 설치(?)한 HCI 안내!

 

24Feb/119

군더더기

군더더기가 많다.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많은 일들. 그 중에 나에게 정말 중요하고 의미있는 일들도 있지만, 있으나 마나 한 것들도 있고, 오히려 해가 되는 것들도 물론 있다. 군더더기라 함은 본질과 구분되는 부차적인, 있어서 오히려 본질을 가리고 불편함과 불쾌함을 초래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처음부터 군더더기가 군더더기인것은 아니다.

설거지를 막 끝내 깨끗한 싱크대를 보며 뿌듯한 마음이 채 남아 그릇이 한두개 더해질 때는 '아직 괜찮아' 생각하며 설거지를 미룬다. 고무장갑을 끼고 세제를 묻히고 한두개밖에 되지 않는 그릇을 닦고 헹구고 정리해 놓는 데에 걸리는 시간과 노력을 생각하니, 그릇이 좀더 쌓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한번에 하는 것이 여러모로 이익일 것 같다. 이런 고민이 몇번 반복되고 나면, 더 이상 밥을 먹을 때 필요한 그릇이 남지 않는 정도가 된다. 이 때 설거지를 하게 되면, 처음 생각만큼 효율적이지 않다. 일단 좁디 좁은 싱크대에 가득 담겨있는 그릇들을 어느 정도 분류해 놓아야 닦을 때 걸리적거리지 않고, 때때로 이미 닦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헷갈려 여러번 닦을 때도 있다. 닦는 동안에도 다른 그릇이 차지하는 공간을 피해 닦다보니 좁은 공간에서 불편하게 일하게 되고, 헹구는 데에도 물이 튀기 십상이다.

처음 몇 개의 그릇밖에 없을 때는 군더더기라 하기엔 그다지 더럽거나 불편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없앨 필요성도 그렇게 크지 않다. 쌓이기 시작하면, 군더더기가 아니면서 불편 없이 처리할 시점을 잡기가 참 어렵다. 대부분의 경우 그 시점을 지나 군더더기가 원래의 일에 차질을 줄 정도가 된다. 밥을 먹어야 하는데 그릇이 없다니...

그릇처럼 잘 눈에 띄고 마음 먹으면 비교적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어디 복잡하고 할일 넘치는 요즘 세상에 군더더기가 그뿐이겠는가. 컴퓨터 하드에는 언젠가 보겠지 싶어 하나둘씩 쌓아 놓은 각종 유용한 정보가 한 가득이다. 웹브라우저에는 수십개의 탭들이 자기 차례를 기다리다 점점 왼쪽으로 밀려난다. 즐겨찾기에도 이미 수백개의 링크들이 들어차 있다. 언젠가 가입해 놓은 여러가지 스크랩과 정보저장 서비스에도 각각 어느 정도의 처리하고픈 정보들이 그득하다. 트위터를 하다가 Favorite 처리해 놓은 것도 어느덧 수백가지, 처리율은 그닥 높지 않다. 책상에는 언젠가 읽겠지 싶어 사모은 책들이 이사 후 박스도 채 개봉하지 않은 채 누워있고. 관련 있어 보여 다운 받아 놓은 논문도 디렉토리에 태깅에 각종 분류를 거치고 나서도 어지러이 흩어져 있다. MP3 파일도 국가별, 장르별로 대강은 들어있지만 언젠가는 한번 깔끔하고 찾아보기 쉽게 정리해야 할것만 같다. 디지털 사진이 모이기 시작한 지도 언 10년이 넘었다. 사진은 또 어떠한가.

자, 이 모든 것들이 과연 나에게 필요한 것들일까?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애초에 모은 것들이긴 한데 말이지. GTD를 적용해 볼까, 나만의 엄격한 기준을 만들어서 아예 생기는 양을 줄일까. 조금씩이나마 처리할 시간을 할애해서 꾸준히 없애나가볼까. 효과적으로 정보를 분류하는, 생산성 높이기 관련 정보들 역시 군더더기 곳곳에 묻혀 있은지 오래다. 그냥 혼란한 마음이 이렇게 쏟아내고 나면 좀 나아질까 해서 ㅎㅎㅎ

8Feb/118

되돌아보기

마이너스

바쁘게는 살았으나 새롭게 배워가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연구는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인지 의구심이 들어간다. 바쁜 것도 왜 바쁜지 잘 모르겠고, 시간은 그냥 스르르 녹아 없어져 가는 것만 같다. 박사 시작을 하면서는 기초부터 다시 탄탄히 쌓아야겠다는 다짐을 했건만, 어설픈 성과에 대한 욕심은 자꾸 기본을 무시하고 지름길을 찾으려는 어리석음으로 나타난다. 나의 지식 체계를 보다 공고히 다지고 생각의 넓이와 깊이를 확장시켜야 하겠지만, 보다 단기적이고 편한 것만 보인다. 막연히 생각했을 때에는 참신하고 흥미로울 것 같던 연구 주제도, 파고들어 갈수록 녹록치 않다. 웬만한 것들은 남들이 이미 해놓았고, 내가 새롭다고 느끼던 그 무언가는 사실 실체도 없는 것이었다. 괜찮은 연구주제일것만 같은 막연한 '감'이 기존의 기라성같은 연구를 마주하니 사라진다. 미국도, 학계도 사람 사는 곳은 다 못볼꼴 볼수밖에 없는구나 하는 체념이 들면서, 이런 것에 보다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아직도 마냥 어려 보인다. 생각만 하지 말고 무언가 행동에 옮기고 실질적인 일을 하기는 해야겠는데, 여전히 기초는 없고 아이디어는 뻔해 보이고 그러면서도 서두는 것 같아서 초조하다.

플러스

주위의 열심히 또 잘하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경쟁심이나 주눅드는 마음보다는 그들처럼 되고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그래도 다행이다. 여러 의미의 좋은 롤 모델이 많아서 자극을 받게 된다. 석사 때는 느끼지 못했던 '조직'에서의 안도감 역시 큰 힘이 된다. 나의 여기있음을 믿어주는 사람들이 있고, 나를 동등한 연구자로 대해준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 있다. 나의 생각을 표현하는 법에 있어서 그들의 방식을 조금이나마 익혀가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도 고무적이다. 나만의 관점으로 대화에 기여하는 빈도가 늘어가고 있는 것도 같다. 주위에 쏟아져 들어오는 지적 자극들이 소화하기에 버겁지만 기분 좋다. 학부때, 아니 컴퓨터공학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던 그 순간부터 꿈꿔오던 모습이 매일매일 펼쳐지고 있지 않은가. 환경에 있어서 내가 더 바랄 것은 없다. 그동안 늘 더 나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 옮겨다니고 시험을 보고 했던 것인데 말이지. 이제 주위에 불평할 것도, 하고 싶지도 않다. 정말 나만 잘하면 되는 너무나도 속편하고 깔끔한 상황이다. 낙오되면 어쩌나 두려움이 엄습해 올때는 어두운 방안에서 혼자 몸서리치다가도, 왠지 이렇게 계속 하다보면 뭔가 이룰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에 설렌다.

결론적으로, 플러스 쪽 글이 몇 글자 더 기니까 난 행복한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