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과정을 돌아보며: 박사 3

박사 3: 버티고 버티니 길이 보인다

2012.9 – 2013.8

어느새 박사과정도 3년 차에 접어들었다. 2년 차의 여유는 어느새 사라지고, 나는 더 이상 “저년차”도, 20대도, 미혼도 아니었다. 결혼은 했지만 롱디는 끝나지 않았다. 지희는 박사 말년 차에 접어들었고, 둘이 앞으로 어떻게 커리어를 맞추어 같은 곳에 살 수 있을지 막막했다. 나는 2년 차 중 잠깐의 방황 끝에 학계에 남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고 지희도 교수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결혼을 마치고 Boston에 돌아오니 뭐 하나 이룬 것 없이, 논문 하나 없이 3년 차가 되어 있었다. 불안하고 초조해졌다.

2년 차 말, 연구실에 있던 고년 차 학생들이 우수수 졸업하고, 내 위에는 Katrina밖에 남지 않았다. 내 롤모델이던 Michael은 그해의 스타 학생이었고 역시나 Stanford 교수가 되었다. 연구보다는 학생들 가르치는 것이 좋다던 Max는 모교 MIT에서 프로그래밍 개론 과목을 전담해서 가르치는 전임강사(lecturer)가 되었다. 다른 학생들은 스타트업을 하거나 회사에 취업했다. 워낙 CS 분야의 창업 열기도 뜨겁고 투자상황도 좋아서 주위에 박사학위 취득 이후에 스타트업을 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나보다 저년차 학생으로는 프로그래밍 달인인 Tom, 교육학 석사를 하고 CS 박사의 길을 택한 Carrie, 학부 때부터 좋은 크라우드소싱 논문을 써온 Kyle, 그리고 연차는 나와 비슷했지만 교육 + HCI 연구를 하기 위해 연구실을 바꾼 Elena가 있었다. 불과 2년 만에 연구실 구성원이 확 달라졌고, 딱히 선후배 문화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선배 축에 속했던 나는 왠지 모를 책임감이 들기 시작했다.

ToolScape

비디오 학습으로 연구의 방향을 잡고, 그중에서도 특히 수학문제 풀이, 요리 레시피, 가구 조립하기 등 문제를 해결하는 절차적 지식(procedural knowledge)이 담겨 있는 how-to video에 집중했다. 교육학에 대한 배경과 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교육과 관련된 연구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이론적 바탕을 갖추기 위해 교육학 논문을 많이 읽었다. 2주 정도는 집중 읽기 기간으로 정해 다른 일을 제쳐놓고 하루에 10개 정도의 논문을 정독했다. ToolScape라는 툴을 만들었는데, how-to video 속에 담긴 문제 해결의 각 단계에 관한 정보를 비디오 옆에 표시해 검색과 탐색을 돕는 것이 핵심 아이디어였다. 한 번에 한 프레임밖에 표현할 수 없는 비디오의 매체적 한계를 극복하고 텍스트처럼 내용을 쉽게 훑어보거나, 원하는 특정 단계로 건너뛰거나, 그 단계를 반복해서 볼 수 있게 하여 학습에 도움을 주고자 했다. 툴을 완성하고 사용자 스터디를 통해 유용성을 보였다. 만들면서도 유용할 것이라 기대하기는 했지만, 막상 실제 사용자 스터디를 통해 사람들이 이 툴을 사용해 더 나은 경험을 하는 것을 보니 뿌듯한 생각이 들었다. 처음 HCI 학문의 매력이라 느꼈던 것이 바로 사람들이 현실 세계에서 불편을 겪는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해답을 제시한다는 점이었는데, 이를 실제 경험하면서 즐겁게 일했다. 여태 해온 연구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지만, 많은 우여곡절 끝에 도달한 아이디어이고 박사 연구의 중요한 축이 될 주제라 더욱 애착이 갔다.

9월 CHI 데드라인에 맞춰 여름 동안 열심히 작업한 결과물을 정리했다. 그런데 논문을 제출하기 불과 며칠 전 엄청난 일이 터졌다. 아직 채 출간도 되지 않은 따끈따끈한 논문을 보게 되었는데, ToolScape와 매우 유사한 아이디어였다. 다음 달에 있을 UIST에 출간될 논문이었고, Berkeley에 있는 비슷한 연차의 학생이 하는 연구였다. 여태까지의 연구가 수포로 돌아가는 건 아닌가 싶어 머리가 아찔했다. 바로 Rob에게 사실을 알리고 이제 어떡하냐며 징징대며 호들갑을 떨었다. 소위 말하는 “scoop” 당하는 상황인 것 같았다. 그때 Rob은 내가 독립적인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툴을 만들었기 때문에, 표면적으로 비슷해 보일 수는 있어도 분명 다른 연구적 가치가 있고, 오히려 이 논문이 나왔다는 것은 이 주제에 대한 커뮤니티의 관심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했다.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르고 논문을 마무리해서 제출했다.

모든 연구가 그렇지만, 부족한 점이 많았다. 무엇보다 비디오에서 각 단계 정보를 얻어내는 방식이 수동이었다. 시간적 여유가 없어 이 부분을 후속연구로 남겨 두었는데, 아이디어 자체에는 충분한 매력이 있다고 생각해서 CHI에 제출해보기로 했다. 그러나 역시 또 떨어지고 말았다. 1, 2년 차 프로젝트에 이어 3연패. 예상했듯 기술적 완성도의 부족이 발목을 잡았다. 아이디어에 있어서는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고, 기술적인 부분을 보완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겠다는 확신을 얻은 게 그나마 수확이었다.

논문은 떨어졌지만, Rob과 나는 피드백을 받을 기회를 많이 만들어 프로젝트를 다듬어 나갔다. 학과의 연구 Qual 시험에 ToolScape를 발표해서 학과의 다른 교수 두 분에게 피드백을 받았고, 정규 논문보다 수월한 CHI의 Student Research Competition에 ToolScape을 제출했고, 학회에서 심사하는 교수들 앞에서 발표해 2등을 하는 나름 쾌거(?)를 이루었다. 학회 등에서 박사 학생이 자기 연구를 발표하고 교수들에게 피드백을 받는 Doctoral Consortium에도 ToolScape을 가지고 나갔는데, 정말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얼굴이 시뻘게지고, 너무 자존심이 상해서 반박하고 싶었지만, 맞는 말이었기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엄청 날카로운 피드백을 주던 교수가 나중에 교수 인터뷰를 보러 간 학과 소속이었는데, 이때의 내 발표를 기억하고 그동안 엄청난 발전이 있었다며 칭찬해 주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조금씩 ToolScape을 어떻게 설명하고 어떤 부분을 보완해야 하는지 그림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만 매년 한 번씩 논문이 떨어지는 계속된 실패에 조금씩 지치고 자신감을 잃어 갔다. 하는 연구가 좋았고 결국 될 거라는 믿음은 있었지만, 논문으로 연결되지 못하니 조바심이 들었다. 그 무렵 비슷한 연차의 다른 학교 또래 학생들의 논문이 펑펑 나오기 시작했다. 부질없는 것을 알면서도 다른 학생들 웹사이트에 들어가 어떤 논문이 언제 나왔고, 나보다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비교를 하곤 했다. 조용한 밤 열등감 속에 몸부림치다 잠이 들었다. 캄캄한 동굴을 헤쳐 나가는데 남들은 벌써 저만치 앞서있는 느낌이었다.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Cobi

가을부터 우리 연구실에 Haoqi가 포닥으로 왔다. Harvard 대학에서 크라우드소싱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Northwestern 대학에 교수로 임용된 중국계 미국인 Haoqi는, 부임을 1년 미루고 우리 연구실에서 연구하고 간다고 했다. CS 분야에서는, 특히 HCI에서는 포닥이 그렇게 흔하지 않았다. 그런데 Haoqi처럼 임용이 된 후 1년을 미루고 포닥을 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 임용이 결정되고 포닥을 하니 취업에 대한 걱정 없이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고, 교수라는 새로운 직업에 대해 준비를 할 수 있어 도움이 된다고 했다. Krzysztof도 Harvard 부임 전 Microsoft Research에서 비슷하게 1년을 보냈고, Michael도 Stanford 부임 전 Facebook에서 6개월을 보냈다. 뒷이야기지만 나도 비슷한 과정을 따랐다. Rob은 포닥이라는 제도 자체를 싫어했는데, 교수 임용까지 연구자의 가방끈을 필요 이상으로 길어지게 하는 악순환이 생길 수 있어서라고 했다. 다만 이렇게 부임을 1년 미루고 하는 포닥에 대해서는 좋은 준비라며 호의적이었다.

Haoqi는 생김새도, 말하는 것도, 실제로도 아주 똘똘했다. 자기주장이 분명했고, 본인이 맞다고 생각하면 지도교수 포함 누구와도 논쟁하고 싸우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한편 내가 본 사람 중 손꼽을 만큼 열심히 일했고, 완벽주의자였다. 성격이 둥글둥글한 편이고 자기주장이 세지 않은 내가 가지지 못한 면이 보여서인지, 나는 오히려 Haoqi와 꽤 잘 어울릴 수 있었다.

스스로 진단하건대 나는 아직도 연구에 있어 홀로서기를 못 하는 상황이었다. 아이디어를 내고 탐색하는 면에서는 꽤 독립적이었지만, 성공적으로 논문으로 연결시킨 경험이 없었다. 랩 선배들도 졸업하고 없는 상황에서 내가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는 프로젝트를 해보면서 연구의 전체 과정을 한번 제대로 경험해 보고 싶었다. Haoqi가 그런 면에서 적격이었다. 지도교수보다는 보다 동등한 위치에서 일하면서 어깨너머로 배울 게 많겠다 생각했다. 더군다나 쓴소리도 솔직하게 해주는 스타일이니 좋은 훈련이 될 것 같았다.

이 무렵 나로서는 기가 막힌 타이밍에 Cobi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수천 명이 참석하고 수백 개의 논문을 다루는 CHI와 같은 큰 학회의 스케줄링에 크라우드소싱을 적용해 논문 저자와 참석자들의 의견을 반영하자는 아이디어였다. Rob과 Haoqi, 그리고 당시 CMU 교수이던 Steven과 포닥이던 Paul, University of Washington 박사과정이자 우리 연구실 출신 Lydia가 함께 하는 큰 규모의 프로젝트였다. 시스템을 만들어 당장 CHI 학회에 적용해보는 것이 목표였다. 내 박사 연구와 직접 관련이 있다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나는 배움이 필요했고 성공이 필요했고 무엇보다 프로젝트가 재미있어 보여서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CHI에 우리가 만든 시스템을 적용하는 건 이래저래 큰일이었다. 사용자가 동료 연구자들이다 보니 참여한 모두의 직업적 신뢰가 걸려있는 문제이기도 하고, 흔히 농담처럼 얘기하는 “연구 수준의 코드”가 아니라 실제 돌아가는 코드여야 했다. 10~11월 즈음부터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다음 해 4월 UIST 논문을 제출할 때까지 거의 6개월 동안 풀타임 작업으로 이어졌다. 특히 Haoqi와 가까이 일하면서 거의 매일 미팅을 하고 옆에 앉아 코딩을 했다. 수십 차례 랩 친구들에게 파일럿 테스트를 받으며 시스템을 고쳐 나갔다. Haoqi의 완벽주의 성격으로 나는 극한의 프로젝트 경험을 할 수 있었고, 여러 번 의견 충돌도 겪었지만 오기가 생겨 버텨 냈다. Haoqi에게서는 하루에 2~3번씩 전화가 왔고, 한번은 일요일 새벽 3시에도 전화가 왔다. 논문을 쓸 때도 Haoqi와 옆에 앉아 동시에 작업하는 pair writing 세션을 수차례 가졌다. 논문 데드라인 날에는 화장실 가는 시간을 빼고는 24시간 정도 한자리에 앉아서 마무리를 했다. Rob이 보다 못해 진지한 말투로 이제 그만하라고 했다. 내 첫 1저자 논문은 이렇게 탄생했다.

Cobi는 성공적으로 CHI 2013을 스케줄링 하는 데에 사용되었고, 그 이후로도 계속 CHI에 쓰이고 있다. 학회 참석자들을 위한 툴인 Confer는 수십 개의 학회에 쓰이고 있고, 나는 UIST 1저자 논문 이외에도 Cobi 프로젝트와 연관된 3개의 논문에 더 참여했다.

전환점이 된 순간 2: 연구도 같이 할 수 있다

Haoqi와 가깝게 지내면서, 나는 종종 내 메인 프로젝트이던 ToolScape 연구가 지지부진하다며 투덜댔다. Haoqi는 왜 그런 것 같냐고 물었다. 나는 교육학도 배워야 하고, 구현 스킬도 이것저것 필요하고, 읽을 논문도 많고, 서너 가지 다른 기술과 알고리듬을 익혀서 적용하는 것이 목표인데 이걸 아직 다 하지 못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Haoqi는 그건 좋은 연구에는 늘 나타나는 일이라고 말했다.

“많은 박사과정 학생들이 이 모든 걸 혼자서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자기 연구니까. 그런데 결국 그러다 보면 현실의 벽에 부딪혀 꿈을 줄이고 목표를 줄여 최소한의 것만 하고 졸업하는 데에 집중하지. 그런데 중요한 건 더 멋진 시스템을 만들고 더 큰 걸 이루는 것이지, 이걸 다 혼자 하는 게 아니지 않아?”

큰 울림이 있었다. 혼자서 모든 걸 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나는 좌절했고, 무엇보다 많은 부분을 포기했다. 물론 박사과정에 내 연구가 있어야 하지만, 혼자서 모든 부분을 다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내 연구의 핵심이 되는 부분을 내가 이끌어가면서, 연구를 가장 훌륭하게 만들기 위해 다른 분야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 아닌가. Haoqi와의 이 대화는 “같이 연구한다”는 것에 대한 내 생각을 뿌리부터 바꾼 중요한 순간이었다. 내 박사 과정의 중요한 두 번째 전환점이었다. 이후로 박사 졸업할 때까지 나는 20개 이상의 학교/연구소에 속한 60명 이상의 연구자들과 협업을 했다.

학계는 고정적이지 않다

내 석사 지도교수였던 Scott이 학교를 옮긴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Stanford를 떠나 UCSD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Diego)로 간다고 했다. 만일 내가 Stanford에 계속 남아서 Scott과 일을 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하니 좀 아찔해졌다. 회사에 다니는 사람이 이직하듯 교수가 학교를 옮기는 것은 꽤 흔한 일이었지만, 도제식으로 교수의 연구실에 소속되어 연구하는 공대 대학원생으로서는 삶의 바탕이 흔들릴 수 있는 일이다.

그런가 하면 연구실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나보다 2년 선배였던 Katrina는 무려 박사 5년 차를 마치고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지도교수와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교수가 1년만 더 하고 졸업해서 취업하라고 권할 정도였으니. Google에서 UX Researcher 인턴을 하고 와서는 너무도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았다며, full-time 오퍼가 나오자 결정을 내렸다. 나보다 1년 아래였던 Tom은 창업을 위해 학교를 그만두었다. 나보다 2년 아래였던 Kyle은 연구 주제가 잘 맞지 않아 역시 그만두었다. 나라면 연구가 잘 맞지 않아도 아까워서라도 학위까지는 어떻게든 받아야겠다 생각했을 것 같은데, 확신을 하고 결정을 내리는 랩 친구들이 새삼 멋져 보였다. 박사과정을 그만두는 건 실패가 아니라 하나의 선택일 뿐이니까.

학회 이야기: CHI, UIST, CSCW 문화

나는 여전히 논문이 이제 막 나올 듯 말 듯 한 “nobody”였지만, 어느덧 4년 정도 CHI, UIST, CSCW 등의 학회에 참석하면서 이 문화에 익숙해져 갔다. 학회는 분명히 정해진 몇 가지 형태의 소셜 인터랙션을 기반으로 한다. 논문 발표의 형태로 더욱 공식적인 소통이 이루어지고,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하게는 쉬는 시간, 식사 시간, 밤 시간 등을 통해 사적인 소통이 이루어진다. 발표할 논문도 없는데 학회에 참석하는 것은 공식적 소통을 할 수 없어 이래저래 자존심도 좀 상하고 모양이 빠지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사적인 소통을 하는 데에는 사실 전혀 무리가 없다. 그런 면에서는 논문이 없더라도 학회에 참석해서 나와 평생을 얼굴 보고 같은 분야에서 활동할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학회가 열리는 며칠 동안 아마 수십 번은 듣는 “are you presenting anything?”이라는 질문에 웃으며 답할 준비는 되어 있어야 한다. Rob은 발표할 것이 없어도 주요 학회는 공짜로 보내 주었다.

학회에 가면 논문에서 이름을 많이 보며 동경해 마지않던 대가 교수들을 보게 된다. 이들은 대부분 주위에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어 쉽게 다가가기 어렵다. 처음 학회에 갈 때는 마치 연예인을 보듯 대가에게 인사도 하고 연구 이야기도 해야겠다는 의무감 같은 게 있었다. 생각 외로 많은 대가가 친절하게 인사도 받아주고 내 연구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지만, 다음 학회에서 이분들이 나를 기억할 확률은 매우 낮았다. 나를 기억하는 경우는 이들의 연구가 내 연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거나, 내 지도교수를 대가가 잘 알고 있거나 한 경우. 결국, 나는 대가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접근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른바 “schmoozing”은 시간과 에너지 낭비라는 생각을 했다. 생각을 바꾸어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학생이나 내 연구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연구를 하는 사람들과 친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연구 분야와 연차가 비슷했던 Walter나 Chinmay 같은 다른 학교의 학생들과 친해졌다. 학회에 가면 따로 시간을 내어 커피나 맥주 한 잔씩은 따로 하는 사이로 발전했다. 이 둘과는 졸업을 같은 해에 하고 교수 지원을 같이해서 job market에서는 경쟁자이기도 했지만, 이런 시스템에 저항하자며 우리끼리 속속들이 정보도 공유하고 서로 여러 가지 도움을 주었다.

Rob은 학회에 가면 늘 한두 세션은 째고 동네 구경을 했다. Scott은 자신이 만나고 싶은 사람을 어느 정도 정해 놓고 만났다. Rob은 소셜을 위한 소셜을 매우 싫어했다. 분명한 주제가 있거나 본인이 정말 편하다고 느끼는 소수의 사람들과 주로 대화했다. Scott은 그런 면에서 훨씬 적극적이고 전략적이었다. 쉽게 다가가기는 어려웠지만, 이 학회에서는 누구를 만나 어떤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계획이 분명했고 연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에 대한 준비가 늘 완벽히 되어 있었다. Rob의 슬라이드는 흰 바탕에 Arial 글씨체로 Bullet point가 많이 들어간, 그야말로 공대 스타일이었다. Scott의 슬라이드는 늘 임팩트 있는 사진이나 이야기로 시작했고, 비싼 글씨체를 돈 주고 사서 쓰고 슬라이드에 글씨는 많지 않았다. 스타일이 확연히 다른 두 지도교수와의 경험은 내가 이 스펙트럼 상에서 어느 점에 있고 싶은지 생각할 기회를 주었다.

MOOC와 edX

비디오 학습에 큰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하던 즈음, 2011년 가을 Stanford에서는 인공지능 분야의 스타인 Sebastian Thrun 교수가 전 세계를 대상으로 온라인 수업을 했는데 16만 명의 학생이 수강했다. 이 수업 후 Sebastian은 자신이 평생 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는 학생과 비교할 수 없이 많은 수의 전 세계 학생을 가르칠 기회라며 학교를 그만두고 Udacity라는 회사를 창업했다. 역시 Stanford 인공지능 분야의 대가인 Daphne Koller와 Andrew Ng 교수가 Coursera라는 플랫폼을 창업했고, 곧이어 MIT와 Harvard는 6천만 불을 투자해 edX라는 비영리 플랫폼을 시작했다. 우리 과 교수이던 Anant Agarwal이 CEO가 되었다. MOOC(Massive Open Online Course: “엄청 크고 누구나 들을 수 있는 온라인 수업”)라는 말이 유행했다. New York Times에서는 2012년을 “the year of the MOOC“라 했다. 수십, 수백 년 동안 비슷한 형태로 지속하여 오던 교육 분야에 큰 파도가 하나 몰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대부분 MOOC의 주 컨텐츠는 비디오였고, 웹상에 넘쳐나는 컨텐츠와 이전에 불가능하던 엄청난 규모의 학생 그룹을 결합시키면 새로운 걸 만들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전략적인 이점도 무시할 수 없었다. Stanford, MIT, Harvard 등이 MOOC 시장에 뛰어들면서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 한 학교에 다니고 있으니 이 흐름을 좀 더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MIT 대학원 학생회는 온라인 교육이 학교 교육과 대학원 학생들에게 가져올 파장을 고민하고 우리의 입장을 학교에 전달하기 위한 위원회를 만들었고, 나는 이 위원회에 참여했다. 실제 MOOC 플랫폼 내부와 여기서 나오는 데이터를 들여다보면서 연구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Rob에게 edX에서 인턴십을 하면 어떨까 제안을 했고, Rob은 잠시 생각을 해보더니 예상치 못한 제안이기는 하지만 괜찮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edX의 Chief Scientist인 Piotr Mitros를 소개시켜 주었다. 그당시 edX는 전 직원 50명 정도의 신생 회사에 연구 조직은 사실상 Piotr 혼자였고, 연구 인턴십 제도 자체가 없었다. 어찌어찌 자리를 만들어서 첫 번째 연구 인턴으로 edX에서 여름 동안 일하게 되었다.

edX 인턴십을 생각해 내고, 요구하고, 만들어 내자, 나는 내심 뿌듯했다. 이전까지는 내가 여기까지 애를 써가며 온 것이 결국은 더 나은 환경을 찾아서가 아닐까 생각했다. Boston, MIT, CSAIL… 이 정도의 환경이라면 더는 환경적으로 바랄 것이 없겠다고 생각했었다. 이제부터의 모든 결과는 환경 탓이 아니라 내 탓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완벽한 환경이란 존재하지 않고, 환경은 고정적인 것이 아니며, 좋은 환경에 있는 것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나도 환경의 일부가 되어 좋든 싫든 이 환경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또한 내가 필요한 것을 적극적으로 요구하고 나에게 더 알맞는 환경으로 바꾸어나갈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롱디와 진로

2013년 6월, 지희는 박사학위를 받고 KAIST에 조교수로 임용되었다. 내가 졸업하면서 롱디를 해결하려면 한국으로 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상황이 되었다. 한국, 미국에서의 진로 사이에 특별히 선호가 없었던 나는 오히려 한국으로 목표를 집중하면 되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지희가 8월 한국에 들어가기 전, 우리는 두 달의 신혼 생활을 Boston에서 보냈다. 3년간의 동-서부 롱디가 끝나고, 한국-미국동부 롱디가 시작 되었다.


“박사과정을 돌아보며” 시리즈

Author: mcpanic

어떻게 하면 보다 사람냄새 나는 기술을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는 Human-Computer Interaction (HCI) 연구자 / 컴퓨터과학자 / 새내기 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