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과정을 돌아보며: 석사 1

석사 1: 열정과 경험

2008.9 – 2009.8

미국과 Stanford라는 새로운 환경으로 인한 들뜬 마음은 학기가 시작하고 곧 가라앉았다. 연구, 수업과 더불어 낯선 나라의 문화에 동시에 적응해야 한다는 사실은 어느덧 스트레스가 되었다. 장이라도 보려면 차를 타고 10분은 나가야 하는데 차도 없고… 한국서는 곧잘 하는 영어라고 생각했고, GRE/TOEFL로 어느정도 준비가 되지 않았을까 기대했는데 실전 영어는 너무도 달랐다. 수업이나 연구는 오히려 괜찮았지만 일상대화나 상점에서 점원들과의 소통이 어려웠다. 뭔지도 모르고 끄덕거리다가 엉뚱한 것을 사오기도 하고, “to go”가 포장해서 가지고 간다는 뜻인지도 몰라서 헤맸다. 영어를 하는 나는 원치 않게도 차분하고 과묵한 성격이 되어 있었다.

연구를 시작하다

박사 진학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연구경험을 쌓고 좋은 추천서를 받는 것이라는 주변의 조언을 듣고 개강 첫주에 HCI 연구를 하는 Scott Klemmer 교수의 office hour에 찾아갔다. 한국 교수 연구실에 비해 좁은 공간, 주황색의 소파가 눈에 띄었다. Office hour는 교수를 만나고 싶은 여러 학생이 동시에 찾아와 열린 방에 모여 앉아 대화를 나누는 형태였다. 영어로 입도 잘 안 떨어지는데 외국 학생들 대화를 비집고 들어가 내 이야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간신히 한번 기회를 잡아 창의성 지원 도구에 관심이 많고, 연구 기회가 있을까 해서 찾아왔다고 이야기를 꺼냈다. 정말 운이 좋게 Scott은 때마침 관련 연구를 시작하는 박사과정 학생이 있으니 연락해보라고 했다. 2년 동안 계속된 애증의 연구 프로젝트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같이 연구를 하게 된 박사과정 학생 R은 인도계 미국인 여학생으로, 똑똑하면서 깐깐하고 아직 저년차라 연구 방향이 갈팡질팡하는 중이었다. 이 친구만 유독 이니셜로 쓰는 이유는 다음다음 편(박사 1)에 설명할 것이다. 웹상에 넘쳐나는 웹디자인 예제를 현재 사용자가 디자인에 쉽게 적용할 수 있게 도와주는 툴을 만드는 아이디어였다. 나는 이 학생의 연구를 돕는 보조의 위치에 있었지만, 프로젝트는 이제 막 시작이어서 내가 이바지할 수 있는 부분이 많고 박사과정을 위해서 좋은 인상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기에 열심히 했다.

나는 한국인 특유의(?) 성실성을 발휘하여 미팅 전날은 거의 밤을 새우면서 준비해 가는, 이른바 열심히 했음을 티 낼 수 있는 전략을 택했다. Scott 과의 미팅은 늘 쉽지 않았다. 나중에 듣고 보니 학계에서 유명할 정도로 차갑고 날카로운 성격이었다. 결과적으로 내 전략은 실패였다. 내가 해간 것에 관해 설명하고 점수를 딸 기회는 많이 없었다. Scott은 늘 준비해간 것 이외의 것들에 대해 질문하고 브레인스토밍을 이끌었다. 철저한 준비보다는 이 문제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순발력 있게 대처해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Scott은 보다 사용자 위주로, 보다 매력적인 문제를 만드는 것에 집중했고, 구현과 기술은 이에 맞춰 따라오는 것임을 늘 강조했다. 또한, 종교처럼 사용자의 니즈를 믿었다. 연구자 개인의 그럴 것 같다는 판단은 믿어서 안 되고 모든 주요 결정은 사용자의 반응과 피드백을 통해서 내려야 한다고 했다.

몇 가지 기억에 남는 말로는 “열심히 하는 것보다는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냥 프로젝트에 함께 했다는 것만으로 연구 성과를 냈다고 할 수는 없다.” “1주일에 연구하는 시간이 40시간이 되도록 만들어라. 수업 듣고, 미팅하고, 다른 사람 발표를 듣는 것은 연구시간이 아니다.”

한번은 뜬구름 잡는 어려운 얘기가 계속되어 넋 놓고 있는데 내가 무의식적으로 알아듣는 척을 했다. 그랬더니 Scott이 지금 논의를 요약해서 말해보라고 했다. 당연히 나는 어버버. Scott은 정색하면서 그래서는 안 된다며 따끔하게 주의를 주었다. 그때의 화끈거림은 잠시였지만, 모르거나 놓치는 것이 있으면 대충 넘어가지 말고 당당하게 멈추고 질문을 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수업보다는 연구에 더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조금 다른 스타일의 HCI 연구기회도 찾았다. Communication 학과의 Cliff Nass 교수 연구실에서도 기회를 얻어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역시 박사과정 학생 연구를 도와주는 역할이었고, 전화로 협상하는 상황에서 시스템이 목소리를 분석하여 상대방, 또는 자신의 감정적 흥분 정도를 보여주는 것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연구하는 프로젝트였다. 사회과학 이론에 기반을 둔 실험 위주의 연구였고, 실험심리학의 대가인 Cliff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Scott과 정말 다르게 Cliff는 포근한 인상에, 늘 웃고 좋은 말만 했다. Scott은 꽃무늬 셔츠에 각 잡힌 바지를 즐겨 입는 반면, Cliff는 뭐가 묻은듯한 늘어진 티셔츠를 입었다. 그러나 Cliff가 연구미팅을 하면서 허허허 던지는 한 마디 한 마디는 정신을 번뜩 들게 하는 힘이 있었다. Cliff 교수님은 3년 전 55세의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도 돌아가시고 말았다.

수업

수업 또한 이전에 들어보지 못하던 새로운 경험의 연속이었다. 150명 정도가 수강한 HCI 개론 수업은 design process를 따르면서 앱을 만들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나는 한국형들 두 명과 팀을 이루어 FoodEx라는 밥 먹을 친구 찾아주는 메신저 앱을 디자인했다. 한 학기(10주)동안 팀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관찰, 스토리보드, 종이 프로토타입, 비디오 프로토타입, 구현, 사용자 테스트를 거쳐야 했다. 학기 말에는 팀별로 1분짜리 발표를 하고 포스터 세션을 하는데 주변 회사에서 현업에 종사하는 연구자, UI 디자이너와 엔지니어들이 와서 프로젝트를 평가하고, 눈에 띄는 학생들은 인턴십을 주기도 했다.

다음 학기에 들었던 HCI Studio 수업에서는 아이들을 위한 하드웨어 인터페이스를 디자인했다. 우리 팀은 Clapster라는 이름의, DDR, 펌프 같은 리듬게임을 변형해서 여러 아이가 협력해서 즐길 수 있는 게임을 만들었다. 장갑에 센서를 연결하여 하이파이브, 서로 손잡기 등을 인식하는 아이디어였다. 실제 근처 초등학교를 찾아가 학생들에게 프로토타입을 사용해보게 하고 피드백을 받았다. 정말 하기 싫어했던 납땜을 엄청나게 했고, 자꾸 장갑이 망가져 쉽지는 않았지만 역시 즐거운 수업이었다.

젊은 천재 교수 Jeff Heer의 데이터시각화 수업은 단연컨대 평생 들은 수업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최고의 수업 중 하나였다. 수업마다 주제에 대한 애정과 깊은 지식이 강렬하게 전달되는 멋진 경험을 했다. FoodEx를 같이 했던 형석이 형과 기숙사 방에서 며칠 밤을 새워가며 작업한 축구통계 시각화 프로젝트는 정말 재밌었다.

주변 사람들과 환경

이 학교는 창업의 정신이 곳곳에 배어 있었다. 내가 속해있던 HCI Group만 해도 후에 인스타그램을 창업한 Mike가 있었다. 랩미팅에서 마주친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새로운 앱이 나오면 닥치는 대로 사용해보고 새로운 기술을 사용해서 구현하는 걸 좋아하는 친구였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석사과정 학생으로는 인도 출신인 Akshay가 있었다. 같이 박사과정을 준비하며 초조한 마음을 나누면서 꽤 친해졌는데, 다음 해에 이 친구는 수업 프로젝트로 Pulse라는 뉴스리더 앱을 만들어 대박이 났고, 박사 진학 대신에 창업을 결정했다. 결국, 이 회사는 몇 년 뒤 9,000만 불에 LinkedIn에 인수된다. HCI Group 졸업생 명단에는 구글 창업자 Larry Page도 있었고, 그 지도교수였던 HCI의 대가 Terry Winograd 교수도 이 그룹에 있었다.

나와 같은 해에 CS 석사에 입학한 한국인은 남욱이뿐이었다. 과묵하고 정말 열심히 하는 모습이 인상적인 친구인데, 길을 걸어가면서 랩탑을 한 손에 받치고 코딩을 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 한국인은 CS 박사과정에 거의 뽑지 않는다는 것이 정설이었고, 몇 년에 한 번꼴로 예외가 있다고 했다. 2016년 현재는 10명 정도의 박사과정 학생들이 있는 걸 보니 그새 많은 것이 달라졌다 싶다.

힘들었던 여름

정신없이 연구, 수업에 치이다 보니 어느새 여름을 준비해야 하는 시간이 왔다. 보통 HCI 대학원생의 여름은 학교에 남아서 연구를 계속하거나 인턴십을 하는 것 사이의 선택이었다. 박사 지원을 생각하면 남는 것이 좋은데 회사 경험도 조금 욕심이 나기는 했다. Scott이 여름에 남아도 좋다는 대답을 조금 애매하게 줘서 동시에 인턴을 몇 군데 지원했었다. Microsoft Product Manager 인턴 인터뷰를 보러 시애틀에 갔었고, 인턴 하나 뽑는데 항공, 숙박, 기타경비 지원을 다 해주고 8시간 동안 인터뷰를 보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떨어졌다.

다행히 학교에 남아서 하던 프로젝트를 이어서 할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사수이던 R이 인턴십을 가는 바람에 내가 학부생 두 명을 데리고 연구를 이끌어가야 했다. 그 여름의 나는 이 연구를 이끌어갈 만큼의 내공과 주인의식, 동기가 부족했고, 결과적으로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스스로 실망스러웠고 Scott도 그런듯했다.

이렇게 석사 1년 차는 쉴 새없이 새로운 자극과 경험이 쏟아져 들어온 시간이었다. 힘도 들었지만, 그토록 원하던 환경이었기에 열정이 있었고 늘 배울 것이 넘쳐났다. 그리고 지희를 만났다.


“박사과정을 돌아보며” 시리즈

Author: mcpanic

어떻게 하면 보다 사람냄새 나는 기술을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는 Human-Computer Interaction (HCI) 연구자 / 컴퓨터과학자 / 새내기 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