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mall Step Forward 유학, 연구, HCI, 정보와 사람, 창의성

15Feb/1310

실패를 거울 삼아

사실 블로그를 좀 놓고 있었다. 이렇게 눈코뜰 새 없이 바쁜데, 다른 할 일들 해야할 일들도 많은데 블로그를 붙잡고 있는게 사치라고 느꼈던 것도 있다. 유학 가이드 같이 보다 유용한 글을 써야 하는건 아닌가 하는 고민도 있었고. 그런데 그냥 초심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길게 고민하면서도 아니라 그냥 문득 들었고, 별 생각없이 글쓰기 창을 열었다. 초심이란 게 사실 생각해 보면 별게 아니라 그냥 내가 생각하고 느끼고 고민하고 배우는 것들을 두서없이 편하게 적고 공유하고 공감받고 싶다는 것. 페이스북이 주는 친구들의 친밀하고 즉각적인 댓글과 숫자로 표현되는 내 글에 대한 관심, 트위터가 주는 단순함의 강력함이 블로그의 모멘텀을 많이 가져간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블로그라는 공간만이 가져다 주는 매력도 분명 존재하는 것 같다.

어느덧 유학생활을 시작한지도 4년 반, 학부를 다닌 시간보다 길다고 생각하니 좀 아찔하다. 그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고 스스로도 어느 정도 성장을 했다고 생각을 한다. 사실 수업을 많이 들으면서 학점으로 나의 족적이 남는 학부 과정도 아니고, 언제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성과물을 주로 혼자의 힘으로 고민하고 만들어 내야 하는 대학원 과정은 막막한 면이 많다. 새삼 뒤돌아 보면, 지난 4년 반 동안 여러가지 성과도 많았지만 실패도 많이 있었던 것 같다. 실패는 정말 쓰다. 지기 싫어하고 실패하기 싫어서 아등바등 하는 스타일이라 그런지 실패를 했을 때에 후유증도 큰 것 같다.

실패라는 게 사실 별게 아니다. 큰 잘못을 하거나 되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한 것도 아니고. 그냥 계획한 무엇이 잘 안되면 그게 실패 아닌가. 고통스러운 것도 사실 별게 아니다. 하나 이 길을 걸으면서 배운 것이 있다면, 잦은 실패와 극복을 통해 너무 아프고 쪽팔리는 실패도 사실 지나고 나면 별게 아니라는 것. 또 그때의 고통 역시 당장은 가슴이 미어질 듯 아프지만, 지나고 나면 그 고통 때문에 더 큰 고통을 피할 수 있는 교훈이 되고 조금은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 힘이 된다는 것.

학교는 분명 회사처럼 당장의 치열함이 요구되거나 나의 실패가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지는 곳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점은 실패에 대한 위험 부담이 적다는 것. 그렇기 떄문에 나쁜 점은 밋밋하게 실패하고 제대로 배우지 못하기도 한다는 것. 생각해 보면 다양한 실패 사례들이 있었다. 좋은 아이디어를 찾지 못해 별거 아닌 것을 너무 길게 끌어 계륵처럼 되어버린 적도 있고. 시간과 조바심에 쫓겨 내가 만든 인터페이스와 내가 쓰는 논문의 질을 타협한 적도 있고. 능력 부족으로 한 측면만 보고 큰 그림을 보지 못해 뒤늦게 아차 싶었던 적도 있고. 너무 욕심을 부려 이것저것 벌여놓고 어느 하나 제대로 마무리 하지 못한 적도 있고. 모처럼 제대로 뭔가 잡았구나 싶었는데 간발의 차로 누군가가 조금더 빨리 조금더 세밀하게 조금더 잘 해버려 허탈한 적도 있고. 같이 연구하는 사람들과 어긋나기도 하고, 본의 아니게 불성실하거나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 주위를 실망시킨 적도 있고.

환경이 참 중요하다고 느끼는 게, 이렇게 늘 실패 속에서 살고 위축되기 쉬운 상황인데도 늘 힘을 내도록 도와주는 교수님과 연구실 동료들이 있기 때문이다. 또 늘 신선한 자극을 주고 새로운 방향을 보게 만드는 이 말도 안되는 지성의 집단이 있기 때문이다. 환경이 나에게 주는 가장 큰 혜택은 사실 더 큰 실패를 하기 전에 미리 실패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교수님의 날카로운 피드백이 있기에 더 엇나가지 않을 수 있고, 미리 연구실 안에서 테스트 하고 검증을 받기에 밖에 나가서 부끄럽지 않을 수 있고, 더 새로운 것을 더 깊이 있게 볼 수 있는 환경이기에 뒤쳐지지 않고 흐름을 볼 수 있는 것이니까.

결론: 더 빨리 많이 부드럽게 (rapidly, frequently, softly, and gracefully) 실패해야겠다. 너무 큰 실패는 너무 아프고, 주사처럼 잠깐 따끔하지만 정신차리게 도와주는 실패는 오히려 약이 된다. 재밌게 멋지게 실패할 거리는 너무나 많고, 지나서 지금을 되돌아 봤을 때 실패를 많이 못해본 게 억울할 것 같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