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디어 키워 나가기

우선 이 글에서 이야기하는 ‘아이디어’란 여러가지 의미로 해석 가능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사업이나 연구와 같이 실질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 잠재성을 담고 있는 가다듬어지지 않은 생각의 덩어리라고 정의하겠다. …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보다 ‘똑똑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냐고 물을 것이고, 글쓰기 선생님들은 이런 건 글쓰기 능력 계발에 저해가 될 뿐이라고 할지 모른다.

얼마전 되돌아보기 포스트에서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막연히 생각했을 때에는 참신하고 흥미로울 것 같던 연구 주제도, 파고들어 갈수록 녹록치 않다. 웬만한 것들은 남들이 이미 해놓았고, 내가 새롭다고 느끼던 그 무언가는 사실 실체도 없는 것이었다.

우선 이 글에서 이야기하는 ‘아이디어’란 여러가지 의미로 해석 가능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사업이나 연구와 같이 실질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 잠재성을 담고 있는 가다듬어지지 않은 생각의 덩어리라고 정의하겠다.

그럴듯한 아이디어도 좀더 생각해보니 실체가 없는 것이더라.. 요즘 하루에도 몇번씩 겪고 있는 일이다. 분명 어제 교수님이랑 이야기 할 때는 뭔가 큰 것 하나 건진 것같은 짜릿함이 있었는데, 오늘 다시 보니 그냥 뻔한 이야기였을 뿐. 막상 이걸로 무언가 새롭게 해볼만한 건 없을 것 같고, 이미 기존의 것들로도 충분히 해결되고 있는 것 같고, 문제 자체도 그렇게 흥미롭지 않은 것 같다.

슬픈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어찌 생각하면 그만큼 생각이라는 것은 흐름과 소통을 통해 가다듬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예일지도 모르겠다. 바라보기에 따라 달라지는, 슈뢰딩거의 고양이 같은 것이 아이디어인가. 그러니 나의 작은 아이디어가 한 사람의 비판으로 인해 사장되어야 할 이유는 없는 것 아닌가. 같은 랩에서 한 다섯 발 떨어진 곳에 앉는 친구는, 얼마전 자기 연구분야의 유명한 사람과 연구 이야기를 하다가 좌절을 했다. 그 사람이 자기가 하는 연구의 가치를 하나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일관했다는 것이다. 불과 몇 시간 전, 굉장히 좌절스러운 말투로 이 이야기를 하면서 학교를 그만 두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도 했다고 한다. 그러더니 지금은 오피스에 있는 화이트보드를 알 수 없는 그림과 다이어그램으로 가득 채워놓았다. 그러더니 교수님을 불러 열심히 설명을 시작했다. 이 아이디어가 앞으로 어찌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분명 이 아이디어가 진화한 결과물은 지금의 그것보다 단단해지고 쿨해지고 더 많은 사람에게 의미있는 것이 될 것이다. 그것 하나는 분명하다.

어차피 내 이야기를 듣고 피드백을 주는 사람들은 떠오르는 단편적인 생각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전체적인 그림을 보면서 고민해 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아이디어를 가지고 운영해 나가는 자신이 중요하다. 아이디어에 대한 스스로의 확고한 믿음이 중요하다. 그 믿음이 막연한 고집일 수도, 주위 사람들의 의견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다. 믿음이 어디서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누구 앞에서건 당당하게 이게 내가 하는 연구고 이 문제가 흥미로우며 나의 접근과 해결책이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구나 일상에 흔히 겪는 문제여서 들으면 5초만에 공감할 수 있는 것이라도, 그 솔루션에 있어서는 실로 무한한 방법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글쓰기에 있어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난감함을 겪는 writer’s block 문제는 일반적으로 많이들 겪는 문제라고 보아도 큰 무리가 없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접근과 해결은 분야나 배경, 목적에 따라 달라진다. 새로운 글쓰기 툴을 만들고 더 나은 인터페이스를 제공하는 방향은 HCI 연구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재미있고 유용할 수 있지만,누구에게는 전혀 와닿지 않는 해결책일 수 있다.인공지능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보다 ‘똑똑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냐고 물을 것이고, 글쓰기 선생님들은 이런 건 글쓰기 능력 계발에 저해가 될 뿐이라고 할지 모른다.

이렇듯, 아이디어란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제안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복잡한 상호관계와 소통의 형태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고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른 모습이 된다. 그렇다고 극단의 상대주의 관점을 취해 어차피 모두를 어떤 상황에서도 만족시킬 아이디어란 없으니 그냥 대충 적당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시작하면 된다는 주장을 하려는 건 아니다.

아니, 그 반대의 이야기가 하고 싶다.

우선 아이디어는 기발한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감할 수 있는 문제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문제가 갖는 가치에 대해서는 누구라도 충분히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배경지식과 분야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알아들을 수 있는 아이디어도 있겠지만, 그러한 아이디어도 근원과 기본 구조에 있어서는 간단한 형태로 치환될 수 있다. 최대한 우리가 늘 마주치는, 피부에 와닿는 문제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이디어만 있으면 다 된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같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출발했지만 누구는 성공하고 누구는 실패하는 사례를 우리는 너무나 많이 보아왔다. 기본적으로 경쟁이 존재하는 모든 분야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결국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은, 처음 떠오른 막연한 번뜩임보다 그 뒤에 올 수십 수백 시간의 좌절과 흥분의 반복적인 가다듬기 과정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 힘든 과정을 거쳐서 지옥에서 살아남은 아이디어는 이제 더 이상 외압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온갖 시련을 다 이겨내고 어떤 공격에도 유연하게 대처하는 마스터가 된다.

Author: mcpanic

어떻게 하면 보다 사람냄새 나는 기술을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는 Human-Computer Interaction (HCI) 연구자 / 컴퓨터과학자 / 새내기 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