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과정을 돌아보며: 박사 1

박사 1: 들뜬, 그러나 힘든 시작

2010.9 – 2011.8

Boston & MIT

새로 이사 온 Boston은 아담하고 아름다운 도시였다. Charles 강이 MIT가 있는 Cambridge와 Boston 사이를 흐르고 있었고, 주변에는 Harvard, Boston University, Boston College, Northeastern University, NEC (New England Conservatory), Berklee College of Music 등의 좋은 학교가 많이 있었다. MIT는 Charles 강변에 있었는데, 강에는 sailing을 하는 사람들이 붐벼 오후마다 장관을 이루었다. California보다 사람들은 다소 무뚝뚝하면서도 타인을 방해하지 않는 배려가 있었고, 날씬했다. MIT와 Harvard가 있는 Cambridge에는 외국 학생이 많았지만, 강 건너 남쪽 Boston에는 식당 전체에 동양인이 하나도 없는 경우도 많았다. Stanford가 실리콘 밸리의 스타트업과 굴지의 기술 회사에 둘러싸여 있었다면, MIT는 Boston 지역 곳곳에 늘어선 학교와 연구소에 둘러싸여 있었다.

나는 MIT Electrical Engineering and Computer Science (EECS: 전자컴퓨터과학과) 박사과정 소속으로, Computer Science and Artificial Intelligence Laboratory (CSAIL) 안에 있는 User Interface Design (UID) Group에서 연구를 시작했다. CSAIL이 있는 Stata Center 건물은 유명 건축가인 Frank Gehry가 설계했고, 오즈의 마법사 같은 소설에 나올 것만 같은 독특한 건물이었다. 건물 안은 네모 반듯한 공간보다 삐죽삐죽 세모, 원형의 공간이 많았다. 이렇게 멋진 건물에서 일할 수 있어 좋기는 했는데, 건물에 비가 새서 소송도 있었고 건물 외벽의 양철(?) 같은 재질 때문에 무선 인터넷이 잘 안 잡힌다는 루머도 있었다. 층마다 구조가 달라 방 번호만으로 원하는 곳을 찾아가기가 어려웠다.

학생은 학과와 Lab 두 군데 소속하게 되는데, 이렇게 매트릭스 구조를 통해 학과를 넘나드는 다양한 연구를 진행할 수 있다. 예를 들어 CSAIL은 100명 정도의 PI (Principal Investigator: 연구책임자)와 1,000명의 연구인력이 속해 있어 MIT에서 가장 큰 Lab이었는데, 이 안에는 EECS 뿐 아니라 기계공학, 수학, 물리학 등을 전공하는 학생들도 다수 속해 있었다. CSAIL에는 큰 규모에 걸맞게 TIG (The Infrastructure Group)라는 별도의 연구 기술지원 조직이 있었다. 서버, 데이터베이스, 네트워크 설정 등 연구에 필요한 환경을 편리하게 구축할 수 있어 시간, 자원 면에서 큰 도움이 된다. CSAIL에서 나오는 연구를 외부와 언론에 제대로 소개하기 위한 전속 언론/PR 전문가도 있었다.

교수진 중에는 컴퓨터과학 분야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Turing Award 수상자가 여러 명 있었고, WWW의 창시자인 Tim Berners-Lee나 자유 소프트웨어 (free software)의 대가 Richard Stallman 같은 분도 있었다. CSAIL 커뮤니티의 메일링 리스트에는 각종 기술, 연구에 대한 다양한 토론이 하루에도 몇 번씩 펼쳐졌고, 유명 교수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토론을 나눴다. 사유 소프트웨어 (proprietary software)에 강력 반대하며 자유 소프트웨어의 보급을 위해 노력하는 활동가인 Richard Stallman은 이 메일링리스트의 단골 멤버였다. 그는 Amazon, Apple 등 상업적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 회사가 잠깐이라도 언급되면 여지없이 이런 회사의 서비스를 사용하는 것이 자유 소프트웨어 정신에 어긋난다며 대안 서비스를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분 사무실 근처를 지나가면 학생들에게 free software 관련 티셔츠를 판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사실은 패션업계 거물이라는 농담도 돌았다.

Stata Center 건물 곳곳에는 딱 보기만 해도 천재 같아 보이는 너드 (nerd)스러운 학생들이 즐비했다. 학부 때부터, 아니 심지어 고등학교 때부터 연구도 하고 논문도 쓴 학생들이 꽤 있었다. 회사 설명회에서 주는 공짜 티셔츠에 청바지가 많은 학생의 교복이었다. 한번은 내가 단정한 셔츠에 코트를 입고 학교에 갔더니, 수업을 같이 듣던 인도 친구가 어디 면접 보길래 차려입고 왔냐고 진지하게 물었다. 공짜 음식 메일링리스트도 있어서 어느 층 부엌에 그룹미팅 하다가 남은 음식이 있다고 공지가 뜨면 3분도 안 되어 접시를 든 대학원생 여러 명이 등장했다. 한국 학생은 EECS 학과에 한 해에 4~5명 정도 입학을 했는데, EE 3~4명, CS 1~2명이 일반적이었다. 한국서 온 학생은 학부 졸업 후 바로 박사로 온 친구들이 많았다. “나는 놀지 않았는데….” 병역특례에 석사를 거치고 와보니 이래저래 동기 중에 나이도 내가 거의 제일 많은 편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자연히 학풍이 드러나는데, 자기 연구에 다른 것 신경 쓰지 않고 한없이 몰입할 수 있는 분위기가 강했다. 당장 실용적이거나 스타트업을 할만한 것보다는 상대적으로 기술적으로 깊이 있게 파고드는 연구가 많이 나왔다. Stanford 학생이 창업해서 CEO를 하는 회사에 MIT 학생들이 CTO로 간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워낙 잘하는 학생들이 많이 있어서 그런지 늘 치열하고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 스스로가 거품이 아닐까, 지금의 성공은 운이고 내가 이곳에 온 것은 학교 측의 실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종종 들었다. 알고 보니 경쟁적인 환경에 자주 나타나는 impostor syndrome은 주위에 꽤 흔했다. 이 학교에 있는 5년 내내 열등감과 자부심이 수도 없이 왔다 갔다 했다.

UID Group

Rob은 EECS 교수로 CSAIL에서 UID Group을 이끌고 있었다. 내 박사 첫 학기가 Rob의 안식년이었는데, Rob은 가족 때문에 다른 지역으로 가지는 않고 지하철 두 정거장 떨어진 Harvard에서 한 학기를 보냈다. 하필 Rob이 공동지도교수였던 Harvard의 Krzysztof 교수 그룹에서 안식년을 보내는 바람에, 나는 지도교수 두 분과 매주 Harvard에서 미팅했다.

Rob은 나와 딱 10살 차이의 젊고 에너지 넘치는 교수로, 동부 토박이로 MIT 학부에 CMU 박사과정 6년 후 바로 모교에 돌아와 교수를 시작한 엘리트였다. 동부에 있고 싶어서 졸업할 때 Stanford, Berkeley 같은 서부의 탑스쿨에는 교수로 지원조차 안 했다고 했다. Rob은 자기 그룹에서 나오는 연구가 기술적으로 새롭고 가치 있는 것이기를 바랐다. 엘리트적인 생각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MIT CSAIL이니까 할 수 있는 연구를 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느끼는 듯했다. Scott이 센스있고 섹시한 연구를 지향한다면, Rob은 기술적으로 깊이 있는 새로운 연구를 지향했다. 이 둘의 차이는 내가 생각하는 Stanford와 MIT 학풍의 차이와도 묘하게 닮았다. 실질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Stanford, 끝까지 파고드는 것을 중시하는 MIT. 이 두 방식을 잘 터득해 내 연구에 담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공동지도교수였던 Krzysztof는 폴란드 출신의 젊은 교수로, 막 교수 2년 차에 접어들고 있었다. 박사 때 인공지능 연구를 하다가 HCI에 매료되어 두 분야를 아우르는 연구를 했고, 점점 더 HCI 쪽의 연구를 시작하던 차였다. Rob이 디테일에 강하고 기술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춘다면, Krzysztof는 좀 더 추상적인 수준에서 “왜?”라는 질문을 많이 던졌다. 이렇게 두 지도교수가 연구의 다른 부분을 건드려 주어 상호보완되는 점이 좋았다. 물론 처음 1~2년은 양쪽을 왔다 갔다 하면서 연구 진행이 느려지거나 갈팡질팡하는 부분도 있었다.

그룹에는 5-10명 정도의 박사과정 학생이 있었는데, 이렇게 숫자가 불분명한 것은 지도교수가 여러 명이거나 여러 그룹에 걸쳐있는 학생이 많기 때문이다. 많은 학생이 나처럼 공동지도를 받았고, 지도교수의 그룹이 아니더라도 관련 있는 연구를 하는 다른 그룹미팅에 자유롭게 참여하면서 협력을 했다. 당시 그룹의 주요 학생들: Sean은 대만 출신으로 과묵하고 무뚝뚝한 편이었고, 필요한 미팅을 제외하고는 모든 일을 집에서 했다. 이따금 그룹미팅에서 자기가 하는 것들을 보여주는데, 그때마다 모두를 놀라게 할 만큼 엄청난 걸 만들어 왔다. 프로그래밍이나 구현 쪽으로 어마어마한 친구였다. Greg는 철학가의 풍모가 있었다. 말이 느릿느릿하고 절대 흥분하지 않았다. 하루에 몇 시간씩 생각과 사색을 위한 시간을 따로 두어 자신의 연구와 철학을 고민했다. 독창적인 생각을 위해 다른 사람이 쓴 논문은 거의 읽지 않는다고 했다. Max는 시니컬함으로 똘똘 뭉친 친구로, 연극을 많이 해서 가뜩이나 발음도 뚜렷한데 날카롭고 냉소적인 농담을 쉴 새 없이 날리는 스타일이었다. 그래도 얄밉지 않았던 것은, 그 누구보다 스스로에게 냉소적이었기 때문이다. Jones 형은 푸근한 인상의 대만 출신 학생으로 일을 오래 하다가 박사과정을 시작했는데, 매사 여유가 있고 항상 좋은 말을 하고 늘 웃었다. 매끼 “밥”을 먹지 않으면 안 되는 지극히 동양적인 식성을 갖고 있었다. Katrina는 그 당시 유일한 여학생이었고, 쿨하고 외향적인 성격에 핫핑크 안경이 인상적이었다. 엉뚱한 말과 행동으로 분위기를 띄우곤 했고, 사교성이 좋아서 누구와도 잘 어울렸다. Michael은 나를 Rob에게 소개해준 바로 그 친구로, 열심히 하는데 잘하고, 자신감 있게 자기 홍보도 잘하는데 사람도 좋아서 트집 잡을 데가 없었다. 기술적으로 가장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모든 분야에 두루 뛰어나 내가 본 많은 연구자 중 “총점”이 가장 높은 사람 중 하나였다.

UID Group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굉장히 독특했다. Rob은 다양한 실험을 하면서 연구환경 자체를 지속해서 “해킹”하는 것 같았다.

  • Open space: Rob은 자신의 사무실을 공용 공간으로 만들고 그룹 학생들과 함께 open space에 앉았다. 내 자리와 불과 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 이러다 보니 교수님과 자주 마주치게 되고 농담 따먹기라도 한 번 더하게 되는 효과가 있다. 처음에는 숨 막히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출퇴근 시간의 개념이 없고 일이 잘되는 곳이라면 아무 데서나 일을 해도 되는 분위기이다 보니 그런 압박은 없었다.
  • 매일 그룹미팅: 매일 한 시간씩 그룹미팅을 했다. 포맷이 해가 가면서 조금씩 달라지기는 했는데, 월수금은 누군가가 자신의 연구 발표를 하고 화목에는 브레인스토밍을 했다.
  • 연구 발표: “low bar”가 모토이다. 정제된 슬라이드는 지양하고 화이트보드나 프로토타입을 활용한다. 누군가 만들어 온 프로토타입을 다 함께 사용하면서 피드백을 주고 향후 방향을 논의했다.
  • 브레인스토밍: 화목에 하는 브레인스토밍은 “think outside the box”를 모토로 정말 온갖 아이디어를 같이 짜내는 시간이다. 누군가가 자신의 연구나 공동의 관심사를 던지고 온갖 아이디어를 주고받는 시간이다.
  • Rolling topics: 그룹이 관심을 가질만한 새로운 논문, 서비스, 앱, 기사 같은 것을 누구나 링크하고 미팅 때 간단히 함께 보고 토론한다.
  • 실시간 피드백: 10명의 사람이 있는데 손을 들고 질문하면 한 명만 말을 할 수 있어 비효율적이다. 더 편하게, 많은 피드백을 바로바로 모으기 위해, 그룹 모두가 각자 랩탑에서 공유된 Google Doc을 열어놓고, 발표를 들으면서 그때그때 실시간으로 의견을 남긴다.
  • Pair research: pair programming 개념에 착안한 것으로, 일주일에 한 시간씩 두 명씩 짝지어 서로의 연구를 돕는다. 다른 친구들의 연구 결과만 보는 것이 아니라 어떤 도구를 쓰고 어떤 과정과 생각을 거쳐 연구하는지 볼 수 있어 학습효과가 크다. 그룹 내에서 협력도 많이 일어난다.
  • HCI 세미나: 매주 외부의 교수나 연구자를 초청해 공개 세미나를 개최한다. 세미나 직전에는 연사가 그룹과 함께 점심을 먹고, 학생 각각이 1분 동안 자신의 연구를 연사에게 설명한다.

 

첫번째 좌절과 상처

새로운 출발과 활기찬 그룹 분위기에 한창 들떠있던 초가을, 첫 번째 뼈아픈 시련이 닥쳐 왔다. Stanford에서 2년 동안 내가 연구를 도왔던 R은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HCI 분야의 대표 학회인 CHI에 이 프로젝트에 관한 논문을 제출했다. 그런데 내 이름이 이 논문 저자 목록에 들어가 있지 않았다. 9월 CHI 데드라인이 다가오는데 도통 연락이 없어 감이 좋지 않았는데, 역시나 R은 내 이름을 제외하고 논문을 제출했다. 석사 졸업을 하는 여름 즈음부터 프로젝트에 더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2년 동안 했던 일이 있으니 당연히 이 논문의 저자가 되리라 기대하고 있던 터였다. 너무도 억울하고 부당하다고 느껴 항의의 이메일을 보냈고, 대화는 점점 과열되어 어지러워졌다. 나는 2년 동안 내가 작업했던 부분이 논문에 분명 의미 있는 기여를 했다고 주장했고, R은 여름 동안 논문이 많이 바뀌어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다. 제출했다는 논문을 아무리 읽어봐도 내가 볼 때는 내가 만들었던 부분이 분명 담겨 있었다. 나는 조목조목 이 논문의 어떤 부분에 내가 어떤 기여를 했는지 이메일을 보냈고, 결국 Scott도 이 대화에 개입하게 되었다. 나로서는 야속하게도 Scott은 외부의 제삼자에게 객관적으로 평가를 부탁하자고 중재안을 제시했다. 생각해보건대 학생 사이의 갈등에 한쪽 편을 드는 것에 대한 부담을 느꼈을 수도 있고, 설령 내 주장이 맞는다고 느꼈다 하더라도 떠난 석사학생과 한창 자신이 키우는 박사 학생 사이에서 아무래도 그쪽으로 기우는 것이 아니었을까. 머릿속에서 파괴적인 생각은 계속 이어졌다. Scott이 했던 “그냥 프로젝트에 함께 했다는 것만으로 연구 성과를 냈다고 할 수는 없다”는 말이 나에게 해당하는 것이었나 싶어 씁쓸했다. 그랬다면 Scott은 왜 이 연구 경험을 토대로 나에게 좋은 추천서를 써주었을까. 또 연구에 기여도 하지 않았다는 나를 뽑은 많은 학교의 교수들은 또 뭔가.

이즈음에서 나는 더는 이 모든 논쟁이 무의미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차피 1저자도 아니고 내 박사연구도 아닌 논문의 저자가 아니어도 상관없었지만, 2년 동안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던 프로젝트에 내가 연구적으로 기여한 게 없다는 판단을 받았다는 게 너무도 큰 상처였다. 같이 연구한 사람이 인정해 주지 않는 논문에 저자로 들어가도 좋을 게 전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R과 Scott에게 짧고 분명한 최종 이메일을 보냈다. 이렇게까지 해가면서 나의 기여를 증명받고 싶지는 않고, 이 논문에 저자로 들어가지 않을 것이며, 다만 내가 이 프로젝트에 분명히 연구적으로 여러 면에서 기여를 했으며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던 것이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둔다고 적었다. 일은 여기서 마무리되었다. R에 대한 엄청난 배신감과 내 편을 들어주지 않은 Scott에 대한 실망감이 함께 몰려왔다.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밤마다 악몽을 꾸었고, 몇 달 동안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Rob에게 이 일로 상담했고, Rob은 논문 저자 관련 문제는 학계에 흔히 발생하고 정답이 없는 경우가 많아 애매하다고 했다. 그래서 자신은 최대한 관대하게 저자를 정한다고 했다.

몇 달 후 이 문제의 논문은 CHI에서 최고논문상 (best paper)을 수상한다. 아깝기도 하고 배도 아팠지만, 어쨌든 내가 참여했던 프로젝트의 결말이 좋아서 다행인 부분도 있었다. 이제야 비교적 담담하게 이 일에 관해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그동안 연구에 대해 내가 경험하고 배워왔던 많은 것들이 바닥부터 무너진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 일을 통해 저자 관련 문제에 대한 나의 분명한 방침을 정했다. (1) 연구에 기여를 한 모든 사람을 저자로 한다. 모호하면 포함한다. (2) 협력을 시작하기 전, 누가 주도적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해서 1저자가 될 것인지, 또 각자 역할이 무엇인지 분명히 정의한다. (3) 내가 연구에 분명하고 직접적인 기여를 할 수 없는 프로젝트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은 교훈이었다.

내 연구를 시작하다

이런 힘든 일을 겪는 와중에도 시간은 흘렀고, 다른 일들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새로운 도시와 학교와 그룹과 교수에 적응해야 했고, 수업을 들어야 했고, 내 연구를 시작해야 했다. 차라리 이런 다른 일들이 있어서 조금이나마 덜 힘들었던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창의성을 돕는 도구라는 연구주제를 좁혀서 글쓰기를 돕는 도구를 만드는 쪽으로 연구 방향을 잡았다. 관심 있던 크라우드소싱을 활용해 글쓰기 과정을 도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글 쓰는 사람이 글 자체와 큰 그림에 집중할 수 있도록, 크라우드가 잡일이나 필요한 외부 정보 등을 대신해 준다는 아이디어였다. 글쓰기에 대한 다양한 논문을 읽으면서 글쓰기라는 활동을 이해하는 한편, Boston 지역의 작가나 문학 교수, 전문 블로거 등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아이디어를 발전시켰다. 이 과정에서 몇 가지 기회를 찾아 종이 프로토타입, mockup을 만들어 나가면서 계속해서 피드백을 모으고 반영했다. 그동안 수업에서 배우던 방법론을 내가 풀고 싶은 문제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큰 재미와 보람을 느꼈다 (이 때 썼던 글). 이 주제에 관심을 느끼던 그룹의 Jones 형이 프로젝트를 도와주었고, 석사 때의 실수를 막기 위해 서로의 역할을 분명히 정하고 내가 주도를 하는 쪽으로 방향을 정했다. 몇 달 동안의 진행 끝에 4월에 UIST 학회 논문을 제출했다. 아이디어는 좋았지만 여러 면에서 완성도가 떨어져 아쉬움이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정확히 이 이유로 논문은 떨어졌다. 처음으로 내 연구를 하고 1저자 논문으로 제출해 봤다는 데에서 만족해야 했다.

글쓰기 도구 만들기는 재밌는 프로젝트였지만, 어떻게 더 좋은 연구로 발전시킬 수 있을까 고민이 더해갔다. 그러던 차에 1년 차가 끝나는 여름 Adobe Research에서 인턴십을 했다. 휘몰아치는 좋은 자극과 아팠던 일들을 뒤로하고 석 달 동안 California에서 인턴을 하며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다. 1년의 롱디를 잘 버텨낸 지희에게 고마웠고, 여름을 함께할 수 있어 행복했다. 그리고 이 여름, 나는 박사 연구의 핵심이 된 “교육”이라는 주제를 만났다.


“박사과정을 돌아보며” 시리즈

Author: mcpanic

어떻게 하면 보다 사람냄새 나는 기술을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는 Human-Computer Interaction (HCI) 연구자 / 컴퓨터과학자 / 새내기 조교수

  • Donghoon

    안녕하세요 한국에서 석사 마치고 미국으로 온 박사과정 1년차 입니다. 너무나 할게 많으나 짧은 영어 실력때문에 매사에 학교가 혹은 지도교수가 왜 나를 뽑았을까 라는 생각이 요즘 많이 드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자 하는데.. 똑같이 느껴지셨다니.. 조금은 위안이 됩니다. ㅎㅎ 뭔가 에너지가 다 뽑힌듯 해서 할 의욕도 요즘 잘 나지않는데, 이글을 보며 기운을 차립니다 ㅎㅎ

    • 박사과정 초반에는 자신감도 없고 연구방향도 분명치 않기 때문에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 시간을 이겨내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고민하는 과정에서 많이 배우지 않을까 싶습니다. 멋진 연구자로 성장하시기를 기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