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과정을 돌아보며: 박사 4 Part 1

박사 4-1: 도약, 달리다

2013.9 – 2013.12

edX에서 인턴십을 하면서 여름을 보내고 나니 어느덧 4년 차, 이제는 어떻게 보아도 저년 차라고는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냉정히 바라봤을 때 현재까지 내 박사과정이 그리 성공적이지 않다는 건 분명했다. 가진 것이라고는 박사 연구주제와는 상관없는 인턴십과 석사 때 연구에서 나온 2저자 논문 2개뿐. 4년 차 넘어가는 여름에서야 뛰어난 공동연구자들의 도움으로 1저자 논문이 처음 나왔지만, 역시 박사 연구 주제는 아니었다. 같은 연차의 잘 나가는 친구들이 1저자 논문을 2~3개씩 쓰고 우수논문상도 받는 걸 보니 걱정, 불안, 자극, 좌절이 뒤섞인 기분이 들었다. 잘하는 걸 떠나서 졸업 자체가 가능할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교수가 이러다 어느 날 갑자기 나가라고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객관적으로는 힘든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희망이 없지는 않았다. 온라인 교육 + 크라우드소싱 쪽으로 연구의 방향이 잡히기 시작했고, edX에서의 경험과 그간 해오던 ToolScape 프로젝트로 연구에 조금씩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여기서 좀만 더 잘하면 뭔가 될 거 같은데, “아직은 일러”라며 누군가 자꾸 밀어내는 기분이었다.

edX

스스로 만들어냈기에 뿌듯했고 동기부여가 강했던 edX에서의 인턴십은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박사 3 참고). 수십만 명의 학생이 어떻게 플랫폼을 사용해서 학습하는지 분석할 수 있는 데이터가 있었고, 그 속에서 내가 특히 관심 있던 비디오 학습에 대한 분석 및 개선을 해볼 수 있겠다는 희망이 있었다. 물론 세상일이 그렇게 녹록지는 않았다. edX는 당시 신생기업이었고 플랫폼 안정화에 집중하느라 연구를 할 수 있는 체계가 사실상 없었다. 내가 보고 싶던 데이터는 바로 분석할 수 있는 친절한 형태로 저장된 것이 당연히 아니었다. 우선 플랫폼 초창기라 데이터 저장에 대한 체계가 일관적이지 않아 여름 내내 이른바 데이터 클리닝을 엄청나게 하고 분석 파이프라인을 갖추어야 했다. 또 하나 아차 싶었던 부분은 학습 데이터를 실질적으로 편하게 볼 수 있는 건 해당 수업을 개설한 강사와 학교의 연구자들이지 edX 플랫폼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학생들의 프라이버시, 학교별 규정, 오픈 플랫폼을 추구하는 edX의 방향성 등의 이슈가 섞여 온라인 학습 데이터에 대한 접근 허락을 받는 것이 만만치 않았다. 수차례의 미팅과 개인정보 제거의 과정을 거쳐 여름이 끝나갈 무렵에야 데이터를 만져볼 수 있게 되었다.

이때 edX에는 나와 비슷한 생각으로 새로운 온라인 학습형태를 연구하러 온 사람들이 두세 명 더 있었다. 그중 하나가 여름 동안 edX를 방문하고 그 이후 1년 동안 MIT 우리 연구실에서 포닥을 한 Philip Guo였다. 그 유명한 Ph.D. Grind 책의 저자이기도 하다. 내가 쓰는 이 글을 Twitter에서 언급하기도 했다. Philip의 책은 자신이 학계를 떠나 Google에 엔지니어로 합류하면서 학계에 부정적인 메시지를 던지며 끝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얼마 후 은퇴(?)를 번복하고 University of Rochester에 교수직을 얻었다. 그러면서 작년 Haoqi처럼 1년을 미루고 우리 연구실에서 포닥을 하기로 했다. 속았다며 실망감을 표현하고 학계 복귀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독자들의 이메일이 몰려드는 상황이라고 했다. Philip은 재밌고 쾌활하고 상대방에게 먼저 다가가 편하게 대하는 성격이었다. 나와 여러모로 말도 잘 통하고 연구의 취향도 잘 맞아서 edX에서 비디오 분석 연구를 같이하기로 했다. 각자 하고 싶던 분석이 조금 달랐는데, 다행히 같은 분석 파이프라인을 공유할 수 있어 시너지가 났다. 이 무렵 Learning at Scale이라는 새로운 학회가 생긴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MOOC (Massive Open Online Course)와 같이 온라인을 통한 큰 규모의 학습과 관련된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 학회인데, 교육학과 Computer Science 연구자들이 함께 모여 커뮤니티를 만들자는 취지라고 했다. 나에게 완벽한 커뮤니티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시작과 함께할 수 있어 더욱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Philip과 하고 있던 두 가지 분석 프로젝트를 논문화하여 Learning at Scale에 제출하기로 했다.

Philip의 글은 간명하고 술술 읽히는 힘이 있었다. 오랜 시간 블로깅과 대중을 향한 글쓰기를 해오던 내공이 논문을 쓰는 데에도 반영되는 듯했다. Philip은 어렵거나 현학적인 단어는 최대한 피하고 짧은 문장, 표와 목록, 한 문장 요약 등을 선호했다. Philip의 분석 논문은 무려 데드라인 두 달 전에 거의 완성본이 나왔다. 물론 내 논문은 데드라인 당일에야 완성되었다.

폭풍이 몰아치던 여름

내 논문 완성이 늦었던 건 내가 느리고 게을렀던 탓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2013년 여름과 가을은 정말이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edX 인턴십 동안 시작한 2개의 프로젝트와 더불어 몇 가지 다른 일들이 동시에 진행 중이었다. Rob은 연구실에 학부생 20명을 뽑아서 여름 동안 bootcamp를 진행했다. 학생들에게 웹 개발의 기본을 가르치고 여름 동안 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야심 차고 새로운 프로그램이었는데, 나는 이 중 교육과 비디오 관련 프로젝트를 하는 세 팀을 맡아서 지도를 하기로 했다. edX가 학교 바로 옆에 있다 보니 랩 일과 회사 일을 병행하는 것이 그나마 가능했다. 그런가 하면 박사 주제는 아니지만 나에게 첫 1저자 논문을 안겨준 Cobi 프로젝트의 후속 작업도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CMU에서 포닥을 하던 Paul의 주도로 크라우드소싱을 활용한 학회 논문 주제 클러스터링에 대한 논문이 완성되었고, 나도 3저자로 참여했다. 비슷한 시기에 University of Washington에서 박사를 하던 Lydia가 학회 논문을 태깅하는 툴을 만들었고, 역시 이 프로젝트에도 2저자로 참여했다.

남의 연구를 돕기만 할 수는 없었다. 나의 메인 연구이던 ToolScape 역시 개선작업을 해서 9월 CHI 데드라인을 노리기로 했다. 여름 동안 인턴을 하면서 Rob과 ToolScape의 방향에 대해 상의를 했고, 크라우드소싱을 활용한 비디오 자동요약 기술을 추가하지 않고는 미래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9월에 인턴십을 마치고 학교에 돌아오자마자 3주 정도 올인을 해서 이 부분을 어떻게든 구현해 넣고 실험을 돌려 분석을 추가했다.

여러 프로젝트와 일들을 동시에 처리하다 보니 정신도 없었고 자연히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일들도 생겼다. 내가 Cobi 프로젝트에서 맡은 잡일이 하나 있었는데, 시간도 꽤 걸리고 사실 좀 귀찮기도 해서 며칠째 손을 못 대고 있었다. 뒤늦게야 정신이 번쩍 들어 그 일을 하려고 봤는데, 누군가 이미 해 놓아서 깜짝 놀랐다. 알고 보니 Rob이 며칠 전에 직접 일을 처리했던 것이었다. Rob에게 왜 그랬느냐고 물어봤더니,

“지금 네가 나보다 더 바쁘고 중요한 연구를 하고 있잖아. 이럴 땐 내가 너의 supporting staff가 되어야지.”

라고 했다. 진심으로 고마웠고 한편으로 놀랐다. 좋은 연구를 위해 권위와 형식보다는 실용과 희생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또 실천하는 지도교수를 두어 정말 행운이라 생각했다. 폭풍 감동이 지나가고 나니 연구에 나태해질 때마다 이 상황이 생각나고, 다시금 자신을 다잡는 계기가 된다. 나는 어떤 모습의 지도교수가 되고 싶은지 생각하게 하는 일화이기도 하다.

첫 논문 발표

9월 CHI 데드라인이 지나고 나니 Scotland에서 열리는 UIST 학회가 다가왔다. 내 첫 1저자 논문 발표였고, 몇 주 전부터 엄청나게 긴장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이 분야에 제대로 처음 데뷔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랩에서 두세 번 발표연습을 하면서 Google Doc을 통해 슬라이드별 실시간 피드백과 가상의 청중 질문을 받았다. 발표준비를 하면서 나는 너무도 당연히 슬라이드 별로 말할 내용을 문장으로 적어가며 준비했다. 정확히 어떤 포인트를 이야기하고 영어 표현을 어떻게 해야 할지 단어 단위까지 세세하게 준비를 했다. 연구실에서 연습발표를 할 때 이걸 다 외울 틈이 없어 적어 놓은 것을 읽었는데, Rob은 발표를 멈추게 하고 스크립트를 다 지우라고 했다. 읽거나 외우는, 즉 스크립트가 있는 발표는 죽어있는 발표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Rob의 철학이었다. 그 이후로 나도 스크립트 없이 발표한다는 원칙을 세워 지키고 있다. 그런가 하면 엄청 꼼꼼한 Haoqi는 스토리 전반적인 흐름이 어색하다며 발표 이틀 전에 큰 그림을 뒤흔드는 몇 가지 제안했고, 나는 이걸 도저히 제대로 반영해서 발표할 여유가 없을 것 같았지만, 그의 말이 맞았기에 의견을 따랐다. 말할 내용을 외우지 않았기 때문에 말이 자꾸 꼬여서 괴로운 데다가 발표 구조까지 바뀌어서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Scotland 숙소였던 bed & breakfast (하숙집)에서 학회 세션도 안 들어가고 계속 연습했다. 그 이후로 글로만 된 아웃라인을 잡고 스토리를 여러 번 점검한 뒤에 슬라이드를 만들기 시작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슬라이드부터 만들기 시작하면 시각적이고 지엽적인 부분에 집착하게 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15분짜리 발표 하나를 준비하는 데에 꼬박 3주 정도를 썼고, 엄청난 하드 트레이닝을 통해 무난하게 발표를 마쳤다. 확실히 내부의 기준이 높고 검증이 철저하면 당장은 힘들지만, 밖에 나갔을 때 자신감이 생기고 다양한 상황에 대처하는 힘이 생긴다. 주위에 많은 연구실이 이렇게 “빡센” 내부의 검증과 준비 문화를 갖고 있었다. 위층의 어떤 연구실에서는 연구실 미팅에서 학생이 발표 중에 엄청난 질문과 비판에 못 이겨 거품을 물고 쓰러져서 실려 갔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파괴적이지도, 그렇다고 너무 겉돌지도 않는, 건설적인 피드백을 주고받을 수 있는 문화를 만들기는 쉽지 않지만, 꼭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MIT는 소방 호스를 입에 물리는 듯한 엄청난 학업량과 학문적 압박을 주는 공간이었고, 이를 악물고 살아남는 자들이 훌륭한 연구자로 거듭나는 거친 환경이었다.

MIT 특유의 빡셈과 엄청난 학업량은 다들 힘들다며 앓는 소리를 하게 하면서도 이 어려움을 극복해 낸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델에 대한 회의를 갖게 만드는 일이 일어났다. 2015년 초 학생들의 자살이 잇따른 것이다. 무려 두 달 사이에 네 명의 재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당시 페이스북에 쓴 글:

최근 몇 년간 MIT에서 학생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이 크지도 않은 학교에서 올 academic year 동안만 벌써 5명…. 개인적인 비극으로 치부하기에는 학교 당국이 너무 안일하고 수동적으로 대처하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엄청난 학업량과 주위 학생들, 교수들 사이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누구에게도 힘들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좋은” 학교가 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가 그 구성원의 희생이어서는 안 된다. 이제는 무색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위로의 전체 메일을 넘어서 학교 당국이 더욱 근본적인 대책을 세워야 할 때가 아닐까. (2015.3.8)

Boston의 차가운 잿빛 겨울 날씨와 겹쳐져 더욱 우울했다.

폭풍이 몰아치던 가을

UIST 발표를 마치고 돌아오니 이제 여름에 edX에서 하던 분석 논문을 내기로 한 Learning at Scale 데드라인이 다가왔다. Philip이 주도한 논문은 이미 완성이 되었고, 내가 주도한 논문은 결과만 좀 있고 아직 글이 전혀 없었다. 이 와중에 California 사막지대 휴양지인 Palm Springs에서 열린 HCOMP 학회에 참석했다. 크라우드소싱 연구가 많이 소개되는 학회로 Paul과 함께 쓴 Cobi 논문 발표가 있었고, 한편 나는 학회 전에 이틀 동안 열리는 CrowdCamp라는 워크샵에 조직위원으로 참가했다. 행사 홍보를 하고 올 사람들을 선발하고, 해커톤 형태로 진행된 워크샵의 각종 운영 준비를 했다. 하필 Learning at Scale 데드라인은 HCOMP 학회 도중이었고, 나는 낮에는 학회에 참가하고 밤에는 룸메이트가 깰까 싶어 호텔 로비에서 논문 작업을 했다. 이어서 곧 CHI 논문 리뷰가 돌아왔고 기쁘게도 좋은 점수가 나왔다. HCI 분야의 주요 학회에서는 각 리뷰어가 논문에 1~5점 사이의 점수를 부여하는데, 난생처음 5점 만점도 받아 보았다. 일주일 정도의 시간 동안 리뷰어의 지적 사항에 관해 설명하고 반박하는 rebuttal을 써야 했다. Lydia의 논문은 전반적으로 부정적인 애매한 점수가 나왔지만, 몇 군데 리뷰어의 오해가 있었고 잘만 하면 괜찮을 것 같았다. 역시 rebuttal 작업을 도왔다.

이 모든 일이 몰아치고 정신을 좀 차려보니 오후 4시면 밖이 어둑어둑해지는 겨울이 되어 있었다. 여름에 잠시 휴가를 다녀온 이후로 쉬지 않고 달렸던 몇 달여의 시간이었다. 연구와 박사과정이 잘 진행되고 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당장의 일들에 집중했던 시간이었다. 몸은 정말 힘들었지만, 오히려 마음은 편했다. 집중이 잘 되는 새벽 시간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해 저녁 9-10시에 자고 새벽 2~3시에 일어나 일하는 패턴을 반복했다.

정말 다행히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토록 고대하던 ToolScape 논문이 좋은 성적으로 CHI에 합격하였다. Cobi의 후속 프로젝트였던 Paul의 논문은 HCOMP에, Lydia의 논문도 역전 드라마를 쓰며 CHI에 우여곡절 끝에 합격하였다. 정말 감사하게 이 세 논문 모두 우수논문상 (honorable mention, notable paper)을 받았다. Philip과 나의 edX 분석 논문 두 개도 제1회 Learning at Scale에 모두 합격했다. 처음 열리는 학회라 상대적으로 리뷰 과정이 다른 학회에 비해 덜 엄격해서 운도 따랐지만, 어쨌든 좋은 일이었다. 몇 년을 해도 제자리만 맴돌던 논문들이 불과 몇 달 사이에 펑펑 터졌다. 그러고 나니 좀 멍하기도 하고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CV에 합격한 논문을 한 줄씩 추가하면서 감사한 마음과 뿌듯한 마음이 교차했다.

놀기만 할 수 없던 겨울 한국 방문

드디어 연구에서 좋은 결과가 나오기 시작하고 겨울방학이 되니 기쁜 마음으로 한국에 들어갔다. 지희는 교수로서 첫 학기를 보내고 있었다. 롱디에 대한 어려움을 느낄 틈이 없을 정도로 둘 다 바쁜 몇 달이었다. 아내의 새로운 집과 직장, 직업은 나에게 낯설었고, 직접 와서 새로운 환경을 보니 새삼 우리가 떨어져 지내고 있음을 실감했다. 서로의 생활과 고생에 대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고, 조금씩 낯섦에 적응해 나갔다.

유학생에게 한국 방문은 그야말로 휴식과 치유의 시간이다. 가족과 연인, 친구를 만나 회포를 풀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놀다 오면서 타국에서의 힘든 생활의 스트레스와 피로를 푸는. 나도 석사 때 유학 나오고부터 매년 한 번씩은 2주 정도 귀국을 해서 휴식의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이 겨울은 조금 달랐다. 지희가 한국서 교수가 되고 나는 고년 차가 되고 나니 한국에서의 진로에 대한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학회 등을 통해 간간이 인사드렸던 교수님들께 연락을 드리고 인사를 드리러 갔다. 몇몇 교수님은 세미나 발표를 할 기회를 주시기도 했다. 세미나는 여러 측면에서 좋은 기회였다. 우선 내 연구를 알리고 피드백을 받을 기회를 얻으니 당연히 연구 측면에서 좋고, 초청해 주신 교수님 및 학생들과 교류의 기회가 되었다. 또한, 한국에서 내 연구가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시험을 해볼 수 있고, 내 분야와 연구가 과연 해당 학교와 학과에 잘 어울릴지 감을 잡을 수도 있었다.

만난 교수님들께 진로 상담을 드리니 유용한 정보와 조언을 많이 해 주셨다. 그중에서도 저널 논문을 만들라는 말을 들었다. Computer Science의 많은 세부분야에서는 저널이 아니라 학회에 논문을 낸다. 아마도 변화가 워낙 빠른 분야이다 보니 심사와 출판의 사이클이 빠른 학회가 인정을 받는 게 아닐까 싶다. 좋은 연구는 대부분 학회에 나오고, 저널은 학회 논문을 좀 더 확장시켜 내는 경우가 많았다. 미국에서는 이런 확장작업을 불필요하거나 번거롭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았다. KAIST 등 몇몇 학교에서는 CS의 경우 저널이 없어도 지원할 수 있다고 했지만, 다른 학교에서는 저널이 어느 정도 있어야 한다고 했다. 특히 SCI 등재지 논문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MIT에 돌아와 Rob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내가 한국으로의 진로를 생각한다면 저널을 쓰는 것에 대해 충분히 지원을 해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SCI가 뭐냐고 했다…. 둘이 나란히 앉아 SCI 등재지 목록을 열어놓고 HCI 분야 등재지를 살펴보았다. 아쉽게도 MIT 교수 12년 차인 Rob이 알거나 논문을 내본 적이 있는 저널은 거의 없었다. 괜히 내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무리 제도와 기준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이런 기준에 내 연구를 억지로 맞추는 것이 과연 맞는 일인가에 대한 회의가 들었다. 그런가 하면 미국과 달리 박사 졸업 예정자가 지원하는 것이 제도적으로 막혀있는 학교들도 있었다. 이른바 “fresh Ph.D.”는 교수지원을 할 수 없고, 결국 포닥이나 다른 학교에서 교수 재직 경험이 있어야 임용이 가능한 것이다. 이제는 많은 학교에서 이런 기준이 없어지거나 개정 중이라고 한다. 객관적인 평가 기준을 세우는 일은 중요하지만, 평가와 측정의 편의 때문에 해당 분야의 실질적인 분위기를 반영하지 못하는 제도는 한국 학계를 섬으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

한국 방문을 통해 이제 실적이 막 나오는 시점에서 잠시 우쭐해질 수도 있었는데, 나는 아직도 갈 길이 멀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교수님들의 솔직한 피드백도 있었고, 발표하면서 내가 스스로 느끼는 부족함도 있었다. 연구의 문을 이제 막 열었는데 아직 알맹이가 없었다. 싹이 막 나기 시작했는데 어떻게 키워나가야 할지에 대한 감이 없었다. 보다 깊이 있는 연구를 해야겠다는 깨달음을 얻었고, 다음 연구를 얼른 하고 싶다는 생각을 안고 미국에 돌아왔다. 2014년 새해가 시작되고 있었다.


“박사과정을 돌아보며” 시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