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의 룰을 만드는 사람
블로그에 글을 안 쓴게 벌써 열흘이 다 되었다니…
시간은 참 빨리도 간다.
오늘 아침 회의 시간에 ‘미국’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주제로 여러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오갔다. GRE니 TOEFL이니 유학이니 나에게 있어 요즘 미국은 ‘교육’과 ‘배움’의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에 생각도 역시 그 쪽으로 치우쳐졌다. 우선 단상에 대한 결론부터 말하자면
게임의 룰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부속으로서 훌륭한 성과를 내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진정 게임을 지배할 수는 없다.
시스템과 프로토콜을 설계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러면서 머릿속에 오가던 생각과 주제들을 그냥 죽 나열해 보았다.
<미국>
- 체계와 원칙을 중시
- building block에서 쌓아가는 능력을 중시
- layer
- hierarchy
- transparency
- 개인의 능력보다는 체계의 완전성에 의지
- 개인은 체계 안에서의 부속
- 인간의 창의적 능력은 체계를 구상/설계/창조하는 데에서 발현
- 체계가 확립되면 그 속에서의 운영은 필요한 자원과 인력을 적시에 투입하는 것으로 결정된다
- 이것이 큰 그림
- 운영이나 부속 내에서도 능력이 물론 중요하지만 결정적 차이는 설계단에서 나는 것이다
<한국>
- 체계, 시스템, 구조에 대한 설계의 필요성과 중요성 인식 부족
- 운영이나 부속적 기능 측면에서의 능력은 탁월
- 배움이 빠르고 적용이 유연하다
- 이론적 바탕이 약하고 scalability, 확장성 등에 대한 고려가 없어 고생을 사서 하는 경우가 많다
- 주먹구구식
- 큰 그림을 그려내는 능력이 부족
무언가를 새롭게 배우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내가 받은 느낌은, 미국이 훨씬 낮은 수준에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보다 기초적이고 (그래서인지 대부분좀 지루하기도 하다) 원리적인 부분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인다. 반면 한국은, 바로 실전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바로 성과가 나타나는 실무적인 것에 배움의 시작단계부터 도전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초반부에는 한국이 앞서나간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고급스러워보이는 스킬을 습득한다거나 화려한 기술들을 구사하는 모습이 종종 나타난다. 반면 미국에서는 아직도 원리를 다룬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더 흐르면 이러한 양상에 변화가 생긴다. 한국은 어설프게 마스터한 그 상황에서 정체되어 있거나 이내 다른 곳으로 초점이 옮겨간다. 그러나 미국은 이제 슬슬 탄탄한 이론과 원리를 바탕으로 practical application들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결국, 한국적 접근법으로는 미국적인 탄탄한 바탕과 확장성 있는 구조, 큰 그림을 이해하는 능력에 있어 뒤쳐질 수밖에 없게 되고, 게임의 주도권은 미국에 넘어가게 된다. 스킬이 뛰어난 한국적 접근법은 결국 게임 자체를 장악한 미국적 접근법의 좋은 ‘선수’나 ‘조력자’가 된다. 그러나 같이 게임을 설계하고 판을 움직일 수는 없다.
어조가 계속해서 미국식 접근법에 대한 예찬론으로 흘러가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지금 이 글에서 이야기하는 ‘체계’와 ‘깊이’에 있어서는 내 생각이 분명하다.
우리나라에는 참 뛰어난 사람이 많다. 머리가 좋은 사람도 많다. 전세계 어디 내놔도 우수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근본적인 구조와 시스템을 이해하고 움직이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어쩌면 관심이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보다 큰 그림을 보고 추상적인 개념들을 구체화하고, 실질적으로 부딪히는 사례들을 추상화하는 ‘시스템 설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안 보이는 것을 보려고 하는 의지, 내부의 원리를 파악하는 능력, specialist와 generalist의 덕목을 조화시키는 능력 등이 필수 요소가 될 것이다.
The Endurance

캐롤라인 알렉산더
뜨인돌
어니스트 섀클턴은 1914년 27명의 대원을 이끌고 세계 최초로 남극대륙횡단에 나섰다. 그러나 이들의 인듀어런스 호는 얼어붙은 바다에 갇혀버리고, 배는 이내 가라앉는다. 부빙에 몸을 실은 이들은 생존을 위한 처절한 투쟁을 시작하게 된다. 모두를 구출하기 위한 6명의 별동대, 그리고 다시 한 번 최후의 모험을 건 3명의 탐험 속에서 섀클턴은 실패했지만 아름답고 위대한 항해를 보여준다. 마침내 구조를 받는 데 성공한 섀클턴과 동료들은 나머지 동료들을 성공적으로 구해낸다.
섀클턴은 몰랐을 것이다. 자신이 또 한 번의 좌절을 겪게 되리라는 것을.
그것이 성공보다 더 위대한 실패가 되리라는 것을.
훗날 세상으로 하여금 그의 이름을 영원히 기억하게 만든 것은
바로 이 실패한 ‘인듀어런스 탐험’ 이었다.
탐험대원 중 한 명인 헐리의 환상적인 사진과 각 대원들의 생생한 느낌을 담은 일기, 그리고 저자의 글이 어우러져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발레리안 알바노프의 북극탐험 이야기인 ‘위대한 생존’, 스티브 도나휴의 ‘사막을 건너는 여섯가지 방법’에 이어 세 번째 읽은 극지 문학. 알바노프의 ‘위대한 생존’과 계속 비교를 하면서 읽게 된다. 인듀어런스 호는 원래 목적인 남극횡단에는 실패했지만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우선 전원이 생존에 성공했고, 사진과 일기 등 자료가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었다. 또한 모험 이후에 섀클턴은 머지 않아 죽기는 했지만 영웅으로 추앙 받았고, 이후의 모험에서도 많은 동료들이 함께 했다. 그러나 ‘위대한 생존’은 ‘인듀어런스’보다 훨씬 더 처절했다. 우선 탐험대 중 단 두 명만이 생존했으며 내부에서는 극한 상황에서 배신자도 있었다. 또한 모험의 내용 조차 이후 거의 잊혀져 갔다.
이 두 탐험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물론 자연의 ‘선택’이 가장 컸다는 생각을 지우기는 어렵다. 섀클턴 일행은 생사의 위기를 넘기기는 했지만 훨씬 안정적인 상황에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반면 알바노프 일행은 지독한 기아에 허덕이면서 극한 환경 속에서 하나씩 죽어갔던 것이다.
조절 가능한 환경에서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리더십이다. 섀클턴은 자기의 것을 양보하고 희생하는 속에서 모두의 생존에 전력을 기울였고, 리더 위치의 대원들보다 일반 대원을 더욱 배려하면서 팀웍 유지에 힘썼다. 반면 알바노프는 정확했지만 지독하리만큼 냉정했고 인간적으로 대원들의 마음을 모으는 데 실패했다. 섀클턴의 서번트 리더십이 모험의 목적달성은 실패로 이끌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단 한명의 희생자 없이 성공적으로 이끌어 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나에게 적용할 점 :
긍정적인 마음가짐, 다른 사람을 위한 자신의 희생이 자신을 위대하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