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는 연구가 엉뚱한, 악의를 가진 집단에 의해 악용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 정도로 임팩트가 있다는 건 어찌보면 그만큼 좋은 연구였다는 뜻일테지만 ㅎㅎ) 그나마 다행인 것은 HCI 는 태생적으로 연구 결과의 사회적인 함의라든가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민한다는 것. 그래서 더 마음에 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막상 연구 속에 빠지기 시작하면 보다 윗단에서 판단해야 할 이런 것들은 보이지 않기 시작할 것 같다. 조금이나마 여유 있을 때 이런 생각들을 조금이라도 해놓으면 무의식 중에라도 초심을 잃지 않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내가 만든 기술이나 새로운 툴, 인터랙션 기법 등이 사람들이 열광하는 제품에 포함되고 그들의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활동에 도움이 된다면 큰 보람을 느낄 것 같다. 그러면서도 좀더 사회적으로 책임이 있는 연구를 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단순히 새로운 기술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 기술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저렴하고 손쉽게 사용될 수 있도록 하는 일. 논문을 제출하는 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소프트웨어라면 오픈소스 공개를 하고 다른 곳으로 보다 널리 활용될 수 있도록 패키징을 하는 등의 추가적인 노력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쓰이지 않는 기술은 결국 의미가 없는 것 아닐까.
한가지 고무적인 것은 HCI 커뮤니티에서 이러한 보다 광범위한 사회적 책임에 보다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 장애인들을 위한 보다 편리한 기술이라든가, 기술에 대한 접근 제약이 많은 사람들을 위한 affordable 한 기술이라든가, 점점 메인스트림 연구로 올라오고 있는 ICTD (Information and Communication Technologies and Development) 라든가. 결국 굉장히 보수적인듯 보이는 학계나 연구 커뮤니티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사회와의 관계, 그 속의 연구자들의 요구와 연구 방향 등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다. 연구자들이 커뮤니티가 원하는 것에 맞추어 연구를 하는 도 있겠지만, 반대로 커뮤니티 또한 주위 상황에 민첩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분야 전체가 도태되거나 매너리즘에 빠지거나 존폐 자체가 위협에 빠질 수 있다. 그런 면에서 HCI 에서는 SIGCHI 같은 곳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 지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연구의 깊이는 없이 커뮤니티가 좋아할 것에만 맞추어서 ‘정치적’ 인 연구만 하는 저렴한 연구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한다. 더 많은 논문이 나올 수 있고 citation 수가 더 올라갈 수는 있겠지만, 결국 그런 연구자의 가치는 사회와 동료들의 엄정한 평가를 받기 마련이다. 결국, 연구자가 갖추어야 할 중요한 자질에는 – 어쩌면 모순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 주위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지켜나가는 깊이있고 끈기있는 자세, 그리고 연구의 사회적 의미와 책임을 잊지 않고 항상 주위를 둘러보며 큰 그림을 볼 줄 아는 자세가 함께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T자형 인재의 가치는 유효하다.
[참고] T자형 인재에 대해 언급했던 글